- 등산장비와 통신장비가 나아진 요즘에도 등반 중 조난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가끔 신문과 방송에서 접한다. 조난사고가 중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방대책은 무엇일까? 조난당한 후 생환하지 못하고 사망한 사례를 보자. 1993년 12월 17일 설악산에서 K대 고분자공학과 대학생 4명 중 2명이 탈진, 사망했다. 1명은 공룡릉 남단 신선대에서 친구의 품에 안긴 채로, 1명은 가야동 골짜기를 내려가다 쓰러져 사망했다.
백담대피소에서 하루 묵은 이들은 희운각대피소를 향해 17일 아침 8시 출발했다.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오세암에 이른 것이 정오 무렵이었다. 서둘러 라면을 끓여 먹고 출발, 마등령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 공룡릉은 여름철에도 5시간이 걸린다. 동짓달 겨울산은 오후 5시면 캄캄해진다.
당시에는 날씨도 좋았고 쌓인 눈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들은 희운각을 향해 출발, 1275m 봉을 2시간 만인 오후 4시경 통과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생환하지 못한 사례 3건
그런데 길이 자꾸 헷갈렸다. 김군이 먼저 잠이 온다고 호소하며 주저앉곤 했다. 계속 나아가던 중 이군이 실족해 미끄러지더니 발목을 삐어 아파서 걷지 못하겠다며 신발을 벗어 버렸다. 이군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다시 어둠 속을 더듬어 걸었다. 희운각 불빛이 보였다.
생존한 두 사람은 당시를 이렇게 말한다. “멀리서 아물거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힐 것처럼 빤히 바라뵈는 불빛이었어요. 그러니 도와줄 사람을 금방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밤 9시쯤이었어요.” 비교적 상태가 나은 박군과 엄군이 상태가 좋지 않은 이군과 김군을 각각 한 명씩 맡기로 했다. 박군이 지친 이군을 그 자리에 남아 돌보고 엄군은 김군과 희운각으로 가서 도와줄 사람을 불러오기로 했다.
현장에 남은 박군은 이군을 안고 텐트플라이를 겹쳐 뒤집어썼다. 배고픔보다 추위가 심해 배낭 속에 든 라면을 꺼내는 일도 포기했다. 바람에 텐트플라이가 날아 가면 끝장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군은 이군에게 계속 말을 시키다가 대답이 없으면 욕도 하고 따귀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했으나 이군의 헛소리는 어느덧 신음으로 변했고, 이윽고 호흡이 멎었다. 자정 무렵이었다. 늦어도 2시간이면 돌아올 것 같던 구조 일행은 오지 않았다. 동이 부옇게 터올 때 40대 등산객 두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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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악산 황철봉(1,381m)에서 조난자 2명을 구조대가 발견했다. 텐트도 침낭도 없이 이틀밤을 지냈는데도 라이터 덕분에 동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진제공=설악산 공원사무소>
- 희운각 불빛을 코앞에 바라보며 내려간 2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생존자 엄군은 “불빛은 보이는데 길은 절벽으로 끊기곤 해서 귀신이 장난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공룡릉 신선대에서 희운각으로 가는 길은 절벽으로 왼쪽 천불동 쪽의 급경사 절벽 경계선의 오른쪽 바로 옆으로 이어진다. 초행자로선 길이 끊어진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능선을 따라 걷지 않고 오른쪽 완경사 능선을 따라 가야동계곡으로 잘못 내려서는 경우가 많다. 엄군 일행 또한 이런 실수를 했다.
구르고 미끄러지며 내려가다 보니 발자국이 여럿 보였다. 여기서 계곡 위쪽으로 올라갔다면 20여 분 만에 희운각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2명은 발자국들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말았다. 김군이 기어이 주저앉으며 혼자 빨리 내려가 구조를 요청하라고 했다. 엄군은 졸기도 하며 내려갔다. 그렇게 걷다가 너무 졸려서 바위 아래 눈을 치우고 불을 피웠다. 나뭇가지를 주우러 갈 기력이 없어서 라면과 쌀까지 태웠다. 30cm 길이의 원통형 부탄가스용 버너가 있었지만 추위에 조금 타는 듯하더니 곧 꺼져 버렸다.
길을 찾아 헤매면서 수렴동대피소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경. 수렴동대피소 관리인 이영선씨는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총각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쓰러졌어요. 허벅지 안쪽의 바지가 타 있었어요. 대피소 안에 눕혔더니 2시간 뒤에 의식을 회복했고, 그제야 일행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라고 했다. 김군은 희운각으로부터 2km 아래 가야동계곡 상류 지점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또 다른 조난사고 사례다. 2007년 1월 3일 저녁 9시 설악산에서 당일산행을 하던 두 명이 길을 잃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 7시간 만인 새벽 4시경 구조대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51세 모씨(여)는 이미 저체온증으로 숨져 있었다. 이들은 대간령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내려와 마장터로 하산하다가 길을 잃었다.
국립공원 구역이 아닌 산을 보자. 2003년 2월 1일 음력 설날 경기도 포천군 국망봉(1,168m). 세 형제 부부 6명이 산행에 나섰다가 4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국망봉 서쪽 입구인 장암저수지를 오전 11시경 출발했다. 이들은 정상을 오른 후 신로령 방면으로 하산했는데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북서쪽 계곡으로 내려섰다. 다른 등산객이 잘못 들어섰다가 되돌아선 발자국을 보고 제 길인 것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 이들 중 탈진한 일행이 휴대전화로 포천소방서 119에 신고한 시각이 오후 5시35분경이었다. 구조대는 협곡 입구에서 남자 1명을 발견했다. 밤 9시경 계곡 상단부에서 두 여성을 발견했는데 여성 1명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밤 10시경에는 몸이 굳어 있는 남자 1명을 발견했으며, 위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았더니 부부가 있었는데 남자는 이미 숨져 있었다. 선발 구조대 4명은 생존자들을 위해 불을 피웠고, 구조대원들이 추가로 올라오자 하산했는데, 결국 4명이 사망했다.
조난 후 살아남은 경우를 보자. 설악산에서 등산객 2명이 지난 2월 25일 조난신고 후 이틀 만인 27일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직장 동료인 이들은 당일산행 목적으로 25일 새벽 설악동을 출발, 비선대를 거쳐 마등령에 올랐다. 예정 코스는 오세암이었는데 구조대에 접수된 내용은 오후 4시25분경 마등령 북쪽 황철봉(해발 1,381m) 부근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모두 생환한 사례 3건
한산 설악산구조대, 대한적십자사 설악산구조대, 그리고 속초소방서 소속 설악119구조대, 설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재난구조팀이 합동구조대를 편성하여 현장으로 출동, 수색했다. 27일 11시20분쯤 이모(47)씨를 저항령계곡 작은황새골에서, 정오쯤에는 박모(49)씨를 문바위골에서 발견했다. 이들은 저체온에다 탈진상태였으나 걸어서 하산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겨울산에서 침낭도 없이 이틀 밤을 지내고도 생환한 것이다.
겨울산에서 살아남은 경우를 더 보자. 1988년 1월 제주 굼부리(한라)산악회는 국내 최대 빙폭인 설악산 토왕성빙폭 아래에 텐트를 쳤다. 24일 토왕폭 하단을 오르고 25일에는 텐트를 중단으로 옮겼다. 26일 7시20분 상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올라오는 대학산악부로 보이는 팀이 있기에 선두를 양보해주었다.
그런데 대원 김인규씨의 독일제 헬멧이 이들이 떨어뜨린 낙빙에 맞아 4분의 3이 금이 갔다. 김 대원은 “머리가 어지러워 도저히 못 오르겠다. 하산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정원석 등반대장은 “여기에서 하산도 쉽지 않다. 올라 보자”며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래서 등반이 이어졌는데, 이번엔 한 대원이 사용하던 국산 아이스해머가 부러져 아이스해머 1개만으로 등반하다보니 등반시간이 늦어졌다. 상단 정상에 올라 초코파이를 먹고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헤드랜턴을 켜고 하산코스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계곡 가운데서 침낭도 없이 밤을 지냈는데 얼어 죽지 않았다.
백두대간 종주기 <산이 부르면 간다>의 저자 배희선(강릉)씨가 희운각대피소에 묵었다가 조난 소식을 듣고 구조에 나선 팀과 동행했던 목격담을 들어보자. 휴대전화도 없던 1978년경 겨울, 대청봉에서 내려오던 서울의 C회사 등산팀 선두는 희운각에 도착했으나 뒤따라오던 3명이 밤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다. 당시 희운각에는 전문산악회팀이 묵고 있었는데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추적에 나섰으며, 다행히 눈 위에 남아 있는 발자국을 따라갔다. 발자국은 죽음의 계곡으로 나 있었다.
길을 잘못 든 3명은 남자 2명, 여자 1명이었다. 여성 1명이 죽음의 계곡 쪽으로 미끄러지며 나무에 한쪽 다리가 낀 채 몸이 돌아가서 허벅지뼈 골절상을 당했다. 이들은 어두울 때까지 계곡을 따라 내려갔으나 빙폭을 만나 더 내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오버행 바위 아래에 눈을 뚫고 설동을 만들어 밤을 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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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값싼 라이터 1개와 장갑 한 짝이 들어있는 북한산 정릉 라이터 보관함. 공원 입구 보관함에는 라이터 1~3개가 1년 내내 들어있을 뿐 맡기지도 않고 맡기라는 권유도 없다. 2 국립공원 입구마다 게시하고 있는, 산불예방을 위해 화기반입을 금지한다는 경고문. 위반 시 2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린다고 적혀 있다.
- 이튿날 이들을 발견한 구조팀은 골절 부위에 부목을 하고 나무를 잘라다 들것을 만들어 자일 등 등반장비를 이용하여 하산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빙폭 아래로 내려설 수 있었다.
조난 후 사망한 경우 3건, 생환한 경우 3건을 보았다.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 대책은 없었나 보자. 1993년 12월 조난자들은 비록 침낭은 없다고 하더라도 마등령에서 텐트를 치거나 불 피울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했다. 능선에 남은 박군과 이군은 부는 바람과 피로로 이미 불 피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희운각 불빛을 찾아간 엄군과 이군은 길을 헤매다 가야동계곡으로 빠졌다.
엄군은 이군과 헤어진 후 힘이 부족하여 걷기가 힘들어 불을 피웠다. 나무 하러 갈 기력이 없어서 라면과 쌀까지 태우며 불씨를 지키려고 애썼다. 비록 이튿날 수렴동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의식을 잃긴 했으나 불을 지필 수 있어서 겨울밤을 지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룡릉에선 바람 때문에 불 피울 곳이 마땅치 않다. 가야동계곡으로 하산, 이튿날 수렴동대피소에 도착한 엄군은 끽연자라 라이터가 있어서 김군과 헤어진 후 불을 피울 수 있었으나, 엄군과 헤어진 김군은 비흡연자라 주머니에 라이터가 없었다. 라이터가 생사를 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2007년 1월 마장터에서 조난당한 두 명 중 1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구조대가 나타날 때까지 이들은 불을 피우지 않았다. 2003년 2월 국망봉 조난사고에 출동했던 포천소방서 119구조대원은 “남자 3명이 전부 비흡연자라 라이터가 하나도 없었다. 계곡에서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만 피웠어도 전부 생존할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전부 생환한 경우를 보자. 지난 2월 황철봉 부근에서 길 잃은 2명은 하루도 아닌 이틀 밤을 지냈는데, 이들은 밤에는 낙엽을 긁어모으고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지피며 불이 꺼질까봐 잠도 자지 못했다. 대신 낮 시간에 약간 잠을 잤다. 속초소방서 설악119산악구조대 윤보성 대원은 “밤에 불을 피워 꺼지지 않게 하고 식어가는 체온을 약간이나마 유지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1988년 1월 토왕성빙폭 등반대는 계곡에서 굵은 통나무를 주워다 밤새 태웠다. 헬멧이 깨진 김인규 대원은 체력이 달리는지 앞으로 고꾸라져 잠들었으나 나머지 대원은 추위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굵은 고사목들이 타는 열에 상의와 바지 앞쪽에 구멍이 크게 뚫릴 정도였으나 등은 얼음을 댄 것처럼 차가웠다. 이들은 텐트도 침낭도 없었으나 라이터가 있었기에 불을 피워 얼어 죽는 것을 면했다.
1978년경 겨울 죽음의 계곡 바위 아래에서 비박한 C회사 3명에게는 다행히 버너와 라이터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버너를 피워 구조팀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생환 현장엔 라이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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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공원 40일 도보순례 기념케이크의 촛불에 불을 붙이고 있다. 공단이 스스로 라이터 반입을 어기고 있다. 2007년 7월 12일 106명이 순례에 참가한 주왕산 칼등고개. 일시에 많은 인원이 들어오면 자연이 훼손되기 쉽다는 것조차 모르는 일회성 이벤트를 공단 스스로 저지른 행사였다.
- 위의 조난 사례에서 사망한 경우를 보면 이들에겐 라이터가 없어서 불을 피우지 못한 것이 죽음에 이른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반면 생환한 경우를 보면 불을 피워 체온을 약간이나마 유지했다. 한마디로 생환 현장엔 라이터가 있었으나 사망 현장엔 라이터가 없었다.
국립공원에서는 산불 예방 목적으로 2001년 11월 1일부터 라이터 반입과 흡연을 금지했다. 공원 입구마다 ‘라이터 휴대시 과태료 200만원 이하’라는 경고문이 게시되어 있다. 라이터 보관함을 비치해 놓았는데 보관했다 찾아가라고 한다. 라이터를 찾기 위해 오른 코스로 되돌아나와야 할 판이다. 형식적인 보관함이다. 그래서 순찰 도는 공원 직원들도 라이터를 소지하지 않는다. 비상 시 조난자에게 불을 피워줄 수도 없다.
담뱃불로 인한 발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임업연구원(현 국립산림과학원)의 실험결과 보고서를 보면(본지 2009년 3월호 339쪽 ‘낙엽 종류에 따른 담뱃불 발화율 실험결과표’ 참조), 조건이 맞으면 93.4%가 발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담뱃불로 발화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실험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한 연구원 이시영 박사는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를 택해 발화에 맞도록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실험했다. 산에서 자연적인 조건에서 실험한 것이 아니다. 실험보고서만을 보면 자연상태에서 실험한 걸로 오해할 소지가 크다. 보고서에서 말한 발화조건이 제대로 갖춰진 지점이 산속에 있을까 의문”이라고 말했다.
“발화조건 전부 갖춘 자연상태 없을 것”
국립공원시민연대는 2001년과 2007년에 북한산 국립공원 사자능선 입구와 우이동에서 실험을 해보았다. 발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의 왕래가 많은 우이동 소나무숲에서 침엽수 잎을 주워 모아 잘게 부숴서 실험했더니 힘겹게 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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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조난 시 사망 및 생환 사례
그러나 산속, 특히 고지대 능선에서는 임업연구원이 말한 발화조건이 자연적으로 갖춰진 지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방산림청이나 지자체 산불 담당은 “산불은 대부분 야산에서 발생한다. 논밭두렁 태우기, 농부산물 쓰레기 태우기, 한식 성묘, 방화 등이 주원인”이라고 했다. 조난당한 등산객이 피운 불이 산불로 번졌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당일산행에 나선 베테랑도 순간적으로 길을 잘못 들어 다음날까지 산행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등산 초보자는 조난 가능성이 훨씬 크다. 라이터 유무에 따라 동사냐 생환이냐가 갈리기 때문에 라이터는 산행 시 휴대해야 할 필수장비인 것이다. 오히려 라이터가 젖으면 켜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라이터 보관방법, 사용법을 홍보해야 한다. 그리고 라이터뿐만 아니라 약간의 불쏘시개도 비상용으로 휴대토록 해야 한다.
산악단체들이 공원정책에 등산이 기본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탐방객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등산장비나 기술이 왜 우리나라 공원 탐방에 중요한지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데도 공단과 산림청은 근거도 희박한 산불 발화 가능성에 매달려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심대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봄, 가을 입산금지조치는 그야말로 공무원들의 보신주의와 행정편의주의의 극치다.
/ 글 이장오 국립공원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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