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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봉, 나도 오를 수 있다

김영인 2011. 6. 16. 07:48

50대이고 흰 머리가 난 당신? 그래도 문제없다!
      고산등반의 대중화로 너도나도 에베레스트 등반 붐
      셰르파에 의존하는 노멀루트 등반 위주…한 해 수백 명 등정

 

세계 산악인들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네팔 명 사가르마타·티베트 명 초모랑마) 등정 붐이 일고 있다.

남극과 북극에 이어 제3의 극지로 일컬어지는 에베레스트는 인류가 첫 도전을 시도한 이후 초등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1921년 영국 원정대의 첫 도전 이후 1949년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불법등반을 포함해 총 9차례에 걸쳐 티베트 쪽으로 세계 최고봉 정상을 노렸으나, 그 사이 등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대원 4명과 셰르파 10명의 희생만 있었다.

‘슈퍼알피니스트의 전유물’에서 등산인들의 도전 대상

1950년 중국 정부가 티베트를 강제 점령한 이후 티베트 쪽 등반을 금지시킨 반면 네팔 왕국이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자 산악인들의 도전은 자연스레 남쪽으로 옮겨졌다. 그 해 미국 팀의 웨스턴쿰 정찰등반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951년 영국팀은 에베레스트와 로체, 눕체로 둘러싸인 쿰부빙하 하단의 아이스폴 위에 올라서면서 눈에 들어온 로체 서벽을 통한 등정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듬해 봄과 가을 시즌 등반을 스위스 팀이 먼저 신청해 놓음에 따라 영국 대는 스위스 팀의 등반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봄 스위스 팀은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와 함께 남동릉 첫 도전에 나서 해발 8,572m 지점까지 올라 최초의 등정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으나 대원들의 체력 한계로 돌아서야 했다. 그 해 가을 재도전은 루트 변경에 따른 시간 지체로 강풍과 강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철이 임박해 옴에 따라 남동릉에서 등반을 접어야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인류 최초의 세계 최고봉 등정의 영예는 남극과 북극 탐험 실패로 인해 상한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1921년부터 세계 최고봉 정상에 도전해 온 영국 원정대에게 돌아갔다. 1953년 봄 등반에 나선 영국 팀의 제2차 공격조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가 5월 29일 제9캠프(8,350m) 출발 5시간 만인 오전 11시30분 드디어 지구의 용마루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것이다.


▲ 2005년 5월 30일 오전 9시30분경 에베레스트 정상. 1988년 이후 '한 루트 한 팀 등반' 규정이 바뀌고, 1990년대 이후 상업등반대가 많아지면서 에베레스트 등정자 기록이 해마다 갱신되고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처음 밟기까지 이렇듯 오랜 세월과 희생이 따랐지만 초등 이후 등정자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50년대 6명에 불과하던 등정자는 1960년대 18명, 1970년대 80명, 1980년대 180명, 서서히 늘어나다가 1990년대에는 330개팀(대원 2,972명, 고용인 1,811명)에서 359명(대원 316명, 셰르파 43명)의 등정자가 배출된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남쪽(네팔)과 북쪽(티베트)의 베이스캠프는 하나의 도시를 연상케 할 만큼 많은 등반대가 몰려들고, 등정자는 하루에 3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난다. 급기야 2007년에는 한국팀 6개팀을 포함해 96개팀이 등반해 636명(대원 315명, 셰르파 321명)이라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등산인들이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섰다.

이렇게 21세기 들어 매년 수백 명의 등정자가 나와 2010년까지 5,000명(엘리자베스 홀리의 데이터베이스 통계)에 이르는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고산등반의 대중화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게 고산등반가들의 시각이다. 슈퍼알피니스트들이 ‘목숨을 건 도전 대상’으로 삼던 세계 최고봉이 보통 사람들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차원의 도전 대상’으로 변해 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나라 클라이밍의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 등반 메카로 인식되어온 북한산 인수봉도 한갓진 시절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루어지던 1977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당시 인수봉을 오르는 소위 전문 클라이머들은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낼 만큼 소수였고, 인수봉은 자신들만의 놀이터인 양 배타적이었다.

1988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해 대원 6명이 오를 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스포츠클라이머들도 자연암벽으로 몰려들면서 인수봉 역시 등반객이 많아졌다. 1990년대 중반 IMF 외환위기로 실직한 중년층의 가세로 클라이머들은 대폭 늘어났고, 2000년대 들어 한 달에 한 번 이상 산을 찾는 사람이 1,500만 명에 육박하고 그중 암릉파를 비롯한 아마추어 산악인들이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이제 전문산악인과 일반등산인들 간의 경계가 애매해진 것이다.

한때 슈퍼알피니스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세계 최고봉은 이제 보통 사람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마추어급 등산인들의 등정으로 입증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85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미국의 사업가 딕 배스다.

▲ 에베레스트 아이스폴 지대. 크레바스와 빙탑 연속 붕괴 위험이 높은 구간이지만 신비스럽다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유전 개발회사와 스키리조트를 운영하느라 등산에 대해 큰 관심 없이 살아온 딕 배스는 우연한 기회에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목표로 삼고 1983년 한 해 동안 6개 대륙 고봉을 오른 다음 1985년 당시 55세의 나이에 에베레스트마저 등정함으로써 아마추어도 세계 최고봉을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가 펴낸 7대륙 최고봉 등정기인 <불가능한 꿈은 없다(원제 : 세븐 서미트)>는 미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 등산인들에게 고산등반에 대한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일본 산악인 중에서는 75세 고령의 등정자가 배출되기도 했고, 50~60대 일본 산악인들로 구성된 실버터틀(Silver Turtle) 원정대는 가셔브룸2봉(8,035m), 초오유(8,201m) 등 8,000m급 고봉을 등반하다가 세계 최고봉에도 도전하곤 한다. 이들은 젊은 대원들이나 현지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봉 등정에 성공해 왔다.

한국인 가운데서도 재미교포 몇 명이 상업등반대를 이용해 등반에 성공한 바 있다. 2006년 5월 19일 김명준(68)씨가 당시 한국 최고령인 63세 나이로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 재미교포로서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레이스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이성인(63·중동고 OB)씨가 2007년 5월 17일 김해 플라잉점프 팀 대원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9월 24일 오세아니아 최고봉인 칼스텐츠(4,884m)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재미교포로서 두 번째 완등에 성공했다.

이성인씨 역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전문 산악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중동고 시절 1년간 산악부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이후 사회생활과 이민생활에 쫓기느라 산에 대한 생각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머릿속에 산이 다시 떠오른 것은 51세 때 자신의 사업장에서 골반이 부서지는 추락사고를 당한 직후 건강을 생각하면서부터였다.

2007년 봄에는 김해 플라잉점프 팀에 개인경비를 내고 참가한 송귀화씨가 당시 59세의 나이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서는가 하면, 60대 노익장들 8명으로 구성된 실버원정대의 김성봉 대장이 5월 18일 당시 66세로 등정에 성공해 남녀 최고령 등정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렇게 평범한 비즈니스맨이나 장년층과 노년층 등산인들까지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등반대가 많아지면서 노멀루트에 대한 불확실성이 많이 감소됐다는 점을 가장 큰 요인으로 들 수 있다. 1980년대 말까지 ‘한 시즌 한 팀 한 루트’에 한해 등반이 허용되던 네팔 쪽 남동릉 노멀루트에 대한 팀 제한 제도가 흐지부지 사라짐으로써 많은 팀이 같은 시즌에 몰려 자연스레 같은 루트로 등반하게 되고, 그에 따라 등반이 수월해진 것이다.

전 구간 로프 설치로 안정성과 등정률 높아져

여기에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캠프에 짐을 옮겨주고 간단한 일을 도와주는 정도의 역할을 하던 셰르파가 루트 개척뿐 아니라 캠프 구축과 짐 수송에 이어 정상까지 안내해 주는 등, 모든 일을 해결해 줌에 따라 대원들은 고소적응 등 자신의 몸만 잘 컨트롤하면서 캠프를 하나씩 올리다보면 등정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상업등반대가 가세하면서 대다수 상업등반대가 등로로 삼는 노멀루트의 등정률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네팔 쪽 남동릉 루트의 경우, SPCC(사가르마타 환경보호위원회)가 원정대에게 일정액을 받는 대신 등반이 가장 난해하고 위험한 아이스폴 구간(5400~6,100m)에 루트를 개척해 주고, 또한 아이스폴 지대 이후 정상에 이르기까지 상업등반대를 비롯한 많은 원정대에서 인원수에 따라 투여하는 셰르파와 제공하는 장비로 뚫어주기 때문에 등반자 자신이 길을 내느라 애를 먹는 일은 거의 없어진 게 현재 상황이다.

▲ 2007년 5월 남동릉 캠프에 올라선 한국 실버원정대원들. 60대 노익장의 투혼으로 대원 한 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상업등반대의 경우 캠프를 이동할 때도 앞장서 러셀할 일도 거의 없고, 식량과 장비와 같은 무거운 짐을 질 이유도 없어졌다. 오로지 자신에게 필요한 보온의류와 개인적 촬영장비 정도만 메고 오르면 된다. 더욱이 개인 장비를 맡길 셰르파를 고용할 경우에는 빈 몸으로 다녀도 되는 게 요즘의 에베레스트 등반이다. 가장 감격적이기도 하지만 가장 위험한 등정길 역시 손님대원과 셰르파가 1대1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2008년 이후 등반대 수가 급격히 감소하기는 했지만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루트 등반 또한 붐을 조성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네팔 쪽 남동릉 루트에 비해 입산료가 저렴한 데다 티베트등산학교 강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팀이 정상에 이르기까지 전 구간에 로프를 깔아 줌으로써 악천후와 같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준비된 등산인’이라면 등정이 가능해진 것이다.

장비의 발전도 큰 몫을 한다. 방수투습성 원단의 발전은 눈 같은 습기로 인해 고생할 상황을 막아주었고, 우모 제품의 발전은 영하 30도 밑으로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도 활동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여기에 피켈, 아이젠 같은 장비 또한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재질의 제품이 출시되었고, 무전기와 같은 통신기기 역시 30, 4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소형·경량화되었다.

체력을 회복하는 장소인 캠프의 환경도 좋아졌다. 베이스캠프나 전진캠프의 경우에는 대형 텐트에 가스히터를 틀어놓아 따뜻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특히 베이스캠프의 경우 순간온수기를 통해 만들어낸 따뜻한 물로 샤워가 가능 하  베이커리와 카페에서 갓 구워낸 빵을 먹거나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에 베이스캠프에 각종 첨단 통신장비를 갖춰놓음으로써 이메일, 위성전화의 사용도 가능해졌다. 이루 인해 히말라야 오지에 고립돼 있다는 심리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일기예보 전문업체가 위성을 통해 확인한 일기예보를 인터넷을 통해 수시로 전해 줌으로써 정상공격에 적합한 날짜도 사전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일기예보를 받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감’으로 날씨를 예측할 당시에 비해 등정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꿈을 실현하는 주인공은 바로 당신

▲ 1. 2010년 봄 한국 최초로 부자 등정 기록을 세운 허영호씨와 허재석군(왼쪽). 2. 실버대원들이 캠프2에서 따뜻한 물로 피로를 달래고 있다.

 

이제 과학문명의 혜택과 현지 정부의 정책 변화, 그리고 관광산업 분야의 확장으로 적절한 비용을 지불한다면 누구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 발빠른 서구에서는 등산 경험이 적은, 그러나 세계 최고봉을 오르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시고 등반’하는 ‘모집 원정대’ 또는 ‘상업 원정대’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77년 한국의 고 고상돈 대원이 태극기를 들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기까지 1971년 네팔 정부에 입산신청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피나는 장기간의 훈련과 준비과정을 거친 반면, 약 6만 달러의 참가비만 내면 훈련은 물론 정상까지 안전하게 안내를 받으면서 세계 최고봉을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등반에 대해 한때 전문산악인들은 무모한 행위라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제 이러한 상업 원정대는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에베레스트 전 등반대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통계치를 보이고 있다.

이제 에베레스트뿐만 아니라 히말라야 고산등반이 전문산악인의 무대로서만이 아니라 모험심이 강한 모든 이들의 활동무대로서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유럽알프스 등반역사에서 초등정의 시대 후 지금까지도 몽블랑을 비롯해 많은 봉우리들에서 가이드 등반이 성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등반은 행위자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에베레스트 등정이 지나친 과시욕이나 명예욕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고정로프가 전 구간에 깔리고 셰르파가 많은 도움을 준다고는 해도 ‘등반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계산된 모험’이라는 등반의 순수성이 지켜질 때에 한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24년 6월 8일, 해발 7,900m 지점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노엘 오델(Noel E. Odell)이 “말로리와 어빈이 지금도 계속 걸어가고 있다. 정상에 이르기 위해 계속 걷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많은 뜻이 담겨 있지만 표면상으로는- 누구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는 희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주인공은 바로 당신일 수 있다.
 

        ‘슈퍼알피니스트’에서‘등산인’으로 등정자 수준 확 낮아졌다
        1977년 초등 이후 34년간 73개팀 119명 (2회 이상 등정 중복 합산) 등정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는 ‘에베레스트 등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에베레스트 등반은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에 있어 유소년기라 할 수 있는 1977년 고상돈의 한국 초등 이후 1987년 허영호의 동계 등정, 1993년 허영호의 종단 등반, 1995년 남서벽 등반 그리고 2008년 남서 벽신 루트 등반으로 이어지는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사는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이자 발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에베레스트 등반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고상돈, 허영호, 김창선, 엄홍길, 장봉완, 박영석, 오은선, 김재수 등 슈퍼알피니스트들이나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에베레스트 등정은 이제 66세 남자 최고령 등정자(한국산악회 실버원정대 김성봉 대장·2007년 봄 남동릉 루트)와 59세의 여성 최고령 등정자 (김해 플라잉점프 원정대 송귀화 대원·2007년 봄 북릉~북동릉 루트)가 나오는가 하면, 히말라야 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 산악인들(2007년 김해 플라잉점프 원정대 이성인 대원, 2010 제천원정대 허재석 대원·2010년 봄 남동릉)도 나오고 있다.

1977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2010년 봄 4회 등정을 기록한 허영호(57)씨와 그 아들 재석(27)씨의 등정에 이르기까지 에베레스트 등반을 되짚어 본다.


▲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고상돈 대원. 한국은 세계 8번째 등정국이 되었고 고상돈은 5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한국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1953년 5월 29일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에 의해 인류 최초로 등정된 지 24년이 지난 1977년 9월 15일 이루어졌다. 당시 대한산악연맹 회장인 김영도 대장이 이끈 대산련 원정대의 고상돈 대원은 깊은 눈을 헤치며 등반을 강행했다가 정상을 표고 200m도 안 남겨놓은 지점에서 체력이 떨어져 포기하고 당시 최고지점인 해발 8,700m 높이에서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하룻밤 비박 후 내려와야 했던 박상열 등반부대장의 1차공격의 뒤를 이은 정상공격에 성공, 한국 최초로 세계 최고봉 정상을 밟는 영예를 누렸다. 국가로는 세계에서 8번째 등정이자 개인으로는 58번째 등정이었다.

1977년 초등반대는 19톤의 장비·식량에 셰르파 25명 고용

당시 대한산악연맹은 1971년 봄 로체샤르 원정대 편에 카트만두의 관광성에 에베레스트 입산을 신청했고, 이후 4년 가까이 지난 1974년 말 입산허가가 떨어졌으나 봄 시즌에 비해 등반이 어려운 가을 시즌으로 등반허가가 떨어졌다.

대산련 원정대는 총대원 18명에 셰르파가 25명에 이르고 장비와 식량 등 19톤이나 되는 대원정대였다. 캐러밴 또한 카트만두에서 경비행기로 접근하는 루클라(2,700m)에서 시작되는 요즘과 달리 카트만두에서 차량으로 4시간 거리인 람상고에서 출발해 380km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이캐러밴에 동원된 포터가 무려 650여 명이나 되었다.

매년 봄 시즌이면 베이스캠프에 수십 개 팀이 몰려 산 속의 거대한 도시를 방불케 하는 요즘과 달리 1977년 당시에는 ‘한 시즌 한 루트 한 팀’이란 입산허가 방침에 따라 노멀루트 등반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1캠프(6,000m)까지 이어지는 아이스폴에 루트를 개척하는 게 등반의 관건이었다. 수없이 많은 크레바스와 거대한 빙탑이 길게 이어지는 아이스폴은 요즘도 셰르파들이 두려워하는 구간이다.

▲ 1987년 12월 21일 동계 4등을 기록하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허영호.

 

아이스폴 상의 크레바스와 빙탑을 돌파하기 위해 국내에서 제작한 30kg 무게의 철사다리가 무려 100개나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등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77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극지법 속공등반에 나서 등반 26일 만에 사우스콜에 캠프4(7,950m)를 구축하고 등정에 성공했다. 이 등반은 당시 암울한 정치 경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나도 할수 있다’는 자신감과 꿈과 희망을 심어준 쾌거이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한국 산악인들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한 행렬은 거의 매년 이어졌다. 그러나 등정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1984년 겨울 양정산악회 원정대(대장 오인환)는 동계 등정을 노리고 등반에 나섰으나 로체 페이스 해발 7,950m에서 포기하고, 1985년 전국합동대(대장 김기혁)는 서릉으로 등반을 펼쳤으나 7,200m 지점에서 강풍에 밀려 실패했다. 이후 1985년 동계등정을 노린 고려대 원정대(대장 남상태)는 남동릉 8,500m 지점에서 강풍에 밀려 포기했고, 같은 시즌 전국합동대(대장 박영배)는 에베레스트 최난벽이라는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7,500m 지점에서 역시 강풍에 밀려 등반을 접어야 했다.

이렇게 한국 원정대들이 동계 시즌이나 난도가 높은 루트를 등반하게 된 것은 네팔 관광성의 ‘한 시즌, 한 루트, 한팀’ 규정 때문이었다. 이런 규정 속에서 다른 나라 팀이 비교적 쉬운 노멀루트를 먼저 예약해 놓아 어쩔 수 없이 다른 루트를 택하거나 외국 팀이 등반하지 않는 겨울철을 택해 노멀루트 등반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1986년 한국 팀의 등반 역시 실패로 끝난다. 한국산악회원정대(대장 오인환)의 겨울 시즌 남동릉 등반은 강추위와 바람에 밀리고, 크로니산악회 팀(대장 박영배)은 남서벽에 도전해 8,300m까지 진출했으나 셰르파의 추락 사고로 의욕이 꺾이고 등반이 지연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1977년 이후 연패로 얼룩진 한국 산악인의 에베레스트도전은 1987년 한국산악회 원정대의 동계 등정이라는 개가로 바뀐다. 1982년 마칼루(8,463m)에 이어 1983년 마나슬루(8,163m) 등정에 성공한 허영호는 남동릉 루트로 등반, 남봉 부근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실패한 1차 공격에 이어 단독 등정길에 나선 2차 공격에서도 실패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12월 22일 제3차 등정 길에 나서 정상에 올라섰다. 1977년 이후 10년 만에 이루어진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동계시즌 4번째 기록이었다.

▲ 93년 봄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지현옥,최오순, 김순주.

 

1988년 박영배 대장은 남서벽 세 번째 도전에 나섰으나 또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러나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대장 최창민)가 3차례의 정상 공격에서 대거 6명이 등정한다(로체 4명 등정). 첫 번째 공격에서 한국산악계의 간판스타 엄홍길이 당시 한국 최고의 고산 등반가로 꼽히던 김창선과 함께 등정에 성공하고, 2차 공격에서는 장봉완, 정승권, 장병호 세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1차 공격 도중 포기했던 남선우 대원은 단독으로 나선 3차 공격에서 등정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에 힘입어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 해 가을 한국산악회 서릉 원정대(대장 이석우), 마산산악동지회 남동릉 원정대(대장 김인태), 광주학생산악연맹 남동릉 원정대(대장 김하경) 등 3개팀이 도전해 마산 산악동지회는 단일 산악회 최초의 등정을 기록한다.

에베레스트 등정 의혹도 제기된 해였다. 한국산악회 팀은 서릉 등정을 공포했으나 등정자가 제시한 정상 사진이 실제 정상과 다르다는 점과 등정자가 험난한 서릉 상단부 등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등의 이유로 등정의혹을 샀다. 같은 해 겨울 무려 26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광주학생산악연맹 팀은 겨울 시즌 등정을 노렸으나 대원들의 경험 부족과 셰르파의 사망사고로 인해 등반이 지체되면서 등정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세계 각 국에서 봄가을 15개 팀이 몰려 남북으로 69명이란 많은 등정자가 배출된 1990년은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최초의 대원 사망사고가 일어난 해였다. 한·일 합동대(대장 노종백)는 남동릉으로 등반해 대원 3명이 등정에 성공했으나 지원조로 사우스콜 캠프에 올라왔다 대원들과 상의없이 정상으로 향했던 함상헌 대원이 남봉 근처에서 모습을 보인 뒤 실종되는 비극을 당했다. 또한 박영배 대장은 엄홍길·김창선 등의 대원들과 함께 남서벽에 네 번째 도전에서 캠프3를 끝으로 또다시 돌아서야했다.

1991년은 3개 팀이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북한산 인수봉 최난 루트를 상징하는 취나드길 공동 개척자인 이강오 대장이 이끄는 전국합동대는 남서벽에 도전해 7,800m까지 등반했고, 겨울 시즌 남동릉으로 등반한 대구 지봉산악회 팀(김특희)과 동국대 팀(대장 김광진)은 8,650~8,700m에서 모두 돌아서야 했다.

1993년 봄 국내 여성 최초의 등정자 3명 탄생

에베레스트 초등 40주년을 맞은 1993년 봄 시즌에는 에베레스트에 남쪽 12개팀, 북쪽 15개팀 등 무려 27개팀 286명이 등반에 나서 129명이 등정하는 사상 초유의 등정기록을 세웠다. 특히 네팔 쪽에 많은 원정대가 몰린 것은 그 해 가을부터 바뀌는 등반 규정 때문이었다. 네팔 관광성은 지나치게 많은 원정대가 환경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9월 1일자로 노멀루트에 한해 한 시즌 한 루트에 한 팀만 등반을 허용하는 대신 대원 5명 기준 팀당 1만 달러의 입산료를 500%인상했다. 이에 따라 가을 시즌 이후 에베레스트 노멀루트를 등반하는 원정대는 대원 5명 기준 팀당 5만 달러를 내야했고, 추가 인원은 2명에 한해 1명당 1만 달러씩 지불해야 했다. 때문에 그해 가을로 예정되어 있던 원정대들까지도 등반시즌을 봄으로 앞당김에 따라 많은 등반대가 몰렸던 것이다.

▲ 한국 산악인으로서는 7번째 도전에서 남서벽 등반에 성공,95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박정헌(중앙), 김영태(오른쪽)대원.

 

한국 산악인들도 그해 봄 여러 팀이 등반에 나선다. 한국최초의 여성원정대(대장 지현옥)와 전북산악연맹 팀(대장전병만), 그리고 동국대 원정대(대장 이종량) 3개 팀이 네팔쪽으로 등반에 나섰고, 히말라얀클럽 원정대(대장 오인환)는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루트로 등반을 펼쳤다.

4개 팀 가운데 히말라얀클럽이 가장 먼저 정상을 밟았다. 1992년 8월 수교 이후 처음으로 중국 쪽 북릉~북동릉 루트로 등반을 펼친 허영호 등반대장은 봄 시즌 등반사상 가장 빠른 기일에 등정에 성공한 다음 등반대가 많은 네팔 쪽 루트가 안전하겠다는 판단에 남동릉을 따라 하산에 성공했다. 그러나 허영호는 ‘불법 월경’이라는 죄 때문에 한동안 카트만두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여성 원정대는 지현옥 대장과 최오순·김순주 대원이 정상에 올라서 한국 여성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원정 추진 과정 중 대한산악연맹 임원진과의 극심한 불협화음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 원정대는 여성 16,17,18 번째 등정이라는 쾌거를 세웠으나 그 전날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길에 탈진사한 네팔 여성 산악인 파상 라무 셰르파를 구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악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당시 등반에 나섰던 네팔 셰르파들이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악의적인 소문이었던 것으로 훗날 대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동국대 팀은 남서벽으로 정상을 공략하다 루트를 남동릉으로 바꾸어 무산소 등반에 나선 박영석 등반대장을 포함해 안진섭·김태곤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동국대
팀의 안진섭은 하산길에 추락사하고, 대원들이 남동릉 루트로 등반하는 사이 남서벽 단독등반에 나선 남원우는 해발7,700m 지점에서 추락사했다. 전북연맹 팀은 두 차례의 등정시도에도 불구하고 등정 당일 폭설이 퍼붓는 등 날씨운이따라주지 않아 등정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993년 가을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 원정대(대장 임형칠)는 티베트 쪽 루트로 정상 공략에 나선다. 4년 전인 1989년 겨울 한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 광주전남학산 팀은 박현재가 정상에 서는 데에 성공한다.

입산료의 대폭 인상으로 1994년 주춤했던 한국 산악인들의 에베레스트 등반 러시는 이듬해 가을 다시 이어진다. 1995년은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뜻깊은 해였다. 경남산악연맹 원정대(대장 조형규)는 한국인들이 1985년 첫 시도 이후 6차례의 도전에도 해결하지 못한 남서벽에 도전해 김영태·박정헌 대원이 마지막 캠프(8,350m) 이후 남봉(8,765m)으로 이어지는 록밴드 돌파에 성공하고 정상에 올라서는 데에 성공한다.


▲ 경남연맹 원정대 대원이 마지막 캠프를 향해 거벽을 등반하고 있다.

 

남서벽 원정대 외에는 입산료가 네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티베트 쪽 루트로 등반에 나선다. 포항제철 원정대(대장 이동연)와 고려대 팀(대장 김종호)은 북릉~북동릉노멀루트로 정상 공략에 나서고, 전주 개척산악회 원정대 (대장 이동호)는 초등을 노렸으나 그 해 봄시즌 일본 팀이 성공한, 에베레스트 최장 능선 북동릉 등반에 나선다. 박영석(동국대), 홍성택(용인대), 김헌상(동국대) 등 다양한 산악회에서 참가해 전국 합동대 성격을 지닌 개척 팀은 설릉과 침봉으로 이어지는 북동릉을 밀어 붙였으나 해발 7,800m 지점에 캠프4를 구축한 이후 역부족임을 깨닫고 노멀루트로 등반로를 바꾼다.

개척 팀이 악천 후 속에서 등반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포항제철팀과 고려대팀과 합류하게 됨에 따라 3개 팀이 노멀루트 공략에 나선 한국 원정대들은 1차 공격 때 최난 구간인 세컨드 스텝(8,700m)까지 도달했으나 로프를 비롯한 장비가 부족하고 정상에 올랐다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판단 때문에 되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한국 원정대들은 2차 공격에서 개척 팀의 한왕용, 홍성택 대원과 고려대의 조용일 대원이 정상을 밟는 데에 성공했다.  이 등반에서 개척 팀의 한왕용 대원은 동행한 셰르파가 추락한 이후 세컨드 스텝위에서 탈진한 상태에서 제대로 내려서지 못하는 고려대 팀의 조용일대원을 5시간 넘게 기다리다 무사히 하산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6년 가을 조선대산악회 원정대(대장 임형칠·남동릉 루트 2명 등정), 1997년 봄 경북산악연맹원정대(대장 이동연·북릉~북동릉 루트 1명 등정) 등 순탄하던 에베레스트 등반은 1997년 가을 경북대산악회 팀(대장 김특희)의 최병수 대원이 티베트 쪽 북릉 루트로 등반하던 중 눈사태로 사고를 당하면서 에베레스트에 대한 경각심이 되살아난다. 최 대원은 카트만두에서 만난 山친구 박영석에게서 “노스콜 아래는 눈사태 위험이 높으니 조심하라”는 얘기까지 들었는데도 일어난 사고였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욱 안타까움을 샀다.

1999년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김원모)는 동벽 등반에 나선다. 캉슝벽이라 불리는 동벽은 1921년 영국 제1차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한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말로리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등반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벽”이라 말했고, 1983년 재도전에 나선 미국 등반대(대장 제임스모리세이)가 초등하고, 1988년 영·미 합동대가 신 루트 등반에 성공한 이후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은 벽이다. 한국산악회는 이렇게 악명 높은 캉슝벽으로 등반에 나섰으나 역량미달과 현지인들에 의한 장비 도난 등의 이유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 북릉~북동릉 루트에서 최난관으로 꼽히는 세컨드스텝을 내려서는 한국등반대. 1995년 가을.

 

2007년 66세 남자·59세 여자 최고령 등정자도 나와

21세기 새 천년을 맞은 2000년 들어서면서 한국 산악인들에게 에베레스트는 이벤트의 장으로 변해 버렸다. 더욱이 1990년대에 비해 에베레스트를 찾는 상업등반대가 많아짐에 따라 등정률 또한 높아졌다. 이는 셰르파들이 아이스폴 구간뿐만 아니라 옐로밴드, 제네바스퍼, 힐러리스텝에 이어정상에 이르기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하면서 안전뿐 아니라 정상에 올라설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해 봄 대한산악연맹은 한 해 동안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한다는 목표 하에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손중호)를 파견하고, 충북연맹(대장 윤홍건)과 울산연맹(대장 김영문), 대구연맹(대장 장병호) 역시 새 천년을 기념해 세계 최고봉 도전에 나선다. 등반 결과 봄시즌 대산련 원정대 대원2명이 등정에 성공하고, 가을시즌 충북연맹 팀(3명 등정)과 울산연맹 팀(2명 등정)은 로체 등정에도 성공해 한 시즌 2개 고봉 등정을 기록했다. 이렇게 네팔 쪽으로 정상을 공략한 원정대들이 모두 등정에 성공한 반면 대구연맹 팀은 해발8,500m까지 올랐으나 강풍에 밀려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베레스트 등반은 2001년 한 팀도 나서지 않아 멈칫하는 듯했으나 2002년 봄 다시 불붙었다. 그 해 봄 대구산악연맹 팀(대장 김보열)이 북릉~북동릉 루트로 2명 등정하고, 월드컵성공기원 원정대(대장 엄홍길)는 남동릉 루트로 4명이 등정했다. 그 해 가을 시즌 등반한 충남연맹 팀(대장 이세중)과 2003년 봄 등반에 나선 건국대산악회 팀(대장 임종하)은 실패로 막을 내리고, 2003년 봄 서울시연맹 원정대(대장강태선)가 북릉~북동릉 루트로 엄홍길 등반대장을 비롯한 3명의 대원이 등정하는 등, 등정의 성패가 반복되더라도 큰사고 없이 이어지던 에베레스트 원정은 2004년 봄 인명사고로 충격을 준다.

2004년 봄에는 세계 각국에서 무려 63개 팀이 에베레스트에 도전한다. 그중 남동릉 루트에 27개팀, 북릉~북동릉 루트에 32개팀이 도전하는 등, 90% 이상이 노멀루트에 몰려 대원 377명 중 165명이 노멀루트를 통해 정상에 올라서는 기록을 세운다. 한국 팀들의 성적도 좋았다.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원정에 나선 인하대 팀(대장 천병태)은 남동릉으로 대원 2명이 등정에 성공하고, 계명대 원정대(대장 배해동)역시 북릉~북동릉 루트로 2명이 정상에 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계명대 팀의 박무택 등반대장은 정상에서 보안경을 벗고 캠코더를 촬영하던 중 설맹에 걸린 직후부터 등반이 어려워졌다. 결국 박무택 등반대장은 하산길에 탈진해 설사면에 쓰러진 채로 목숨을 잃고, 홀로 하산하던 장민 대원은 실종됐다. 여기에 마지막 캠프(C5·8,300m)에서 대기하다 사고소식을 듣고 구조에 나선 백준호 부대장마저 제5캠프 출발 20시간 뒤 “박무택과 함께 하산 중”이라는 무전을 보낸 뒤 실종되고 말았다. 엄홍길, 박영석의 뒤를 이을 고산등반가로 인정받아 온 박무택 등반대장은 사고 이튿날 홀로 등정 길에 나선 오은선에 의해 세컨드 스텝 위 해발 8,750m지점에서 발견되었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 60대 8명으로 구성된 실버원정대가 출국에 앞서 발대식을 하고 있다. 66세의 김성봉 대장이 등정에 성공했다.

 

박무택과 함께 캉첸중가(2000년), K2(2000년), 에베레스트(2002년) 등 여러 고봉을 등정하며 혈육처럼 가까이 지내온 엄홍길은 이듬해 2005년 봄 계명대산악회원으로 구성된 휴먼원정대를 이끌고 시신수습 등반에 나서 박무택의 시신을 찾았으나 시신을 베이스캠프로 내리고자 하는 원래 계획이 2차 사고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높다는 판단에 등반로를 벗어난 장소로 옮긴 뒤 돌멩이로 묻어놓는다. 같은 시즌 남동릉으로 정상을 공략한 한양대 원정대(대장 김종민)는 대원 4명이 정상에 서는 데에 성공한다.

2006년 봄은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많은 원정대가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해였다. 동국대산악회 팀(대장 박영석), 부산산악연맹 팀(대장 홍보성), 대전산악연맹 팀(대장 윤건중), 제주산악연맹 팀(대장 장덕상), 제주 설암산악회 팀(대장 이창백), 전남대산악회 팀(대장 백두인) 6개팀은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루트로 도전해 13명이 등정에 성공하고, 네팔 쪽 남동릉 루트로 등반한 중동고산악회 팀(대장지훈구), 천안산악연맹 팀(대장 황순광), 양산합동대(대장이상배)는 5명의 등정자를 배출했다. 993년 남동릉 루트로 등정한 바 있는 박영석 대장은 이 등반에서 남동릉으로 하산하는 횡단 등반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2007년 봄 시즌에는 에베레스트 남동릉으로 3개 팀 19명이 도전해서 6명이 등정에 성공한다. 공개 모집을 통해 대원을 선발한 김성봉 대장과 7명으로 조직된 한국산악회 실버원정대는 전 대원이 60세 이상으로 김성봉 대장(66)과 이장우 대원(63)이 등정했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1년 뒤 이장우 대원은 탈진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힐러리스텝 구간에서 뒤돌아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성봉 대장은 현재국내 최고령 등정자로 기록되고 있다.

전문등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실버원정대에 참가한 대원들이 원정에 앞서 한 해 동안 암빙벽 등반을 배우고, 전지훈련 삼아 에베레스트 부근의 트레킹 피크인 임자
체를 등반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쳤을 뿐 아니라 등정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베이스캠프에 들어선 이후 제컨디션을 유지한 대원이 몇 안 되고, 대원들 간의 협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다가 원정을 끝마친 1년 뒤에 이장우 대원의 등반 내용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산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 30년만에 에베레스트를 방문한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원들이 남서벽 원정대원들과 페리제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2007년 봄.

 

2007년은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 3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때문에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원들은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을 하며 지난 30년의 추억을 되짚기도 하고 베이스캠프에 캠프를 구축한 여러 원정대를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뜻깊은 해를 맞아 성과도 좋았지만 끔찍한 인명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한국도로공사 노조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박상수 대장의 희망원정대는 로체 서벽과 에베레스트를 동시에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미곤과 윤중현은 최초로 에베레스트-로체 개인 연속 등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양손가락장애인 김홍빈은 이 두 사람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허영호는 자신의 등정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등반에 나서 개인 통산 3회 등정으로 엄홍길과 함께 한국인 에베레스트최다 등정 기록을 세웠다.

같은 시즌에 남서벽 원정대는 신 루트 개척을 목표로 박영석 대장과 7명의 대원이 도전했다. 남서벽 신 루트 구간은 쿰부빙하 상의 제2캠프(6,500m)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2,000m가 넘는 거벽으로, 박영석 대장에게는 1991년과 1993년에 이은 세 번째 도전이었다. 그러나 셰르파들의 스트라이크와 악천후로 지연되던 등반은 오희준과 이현조 두대원이 제3캠프(7,900m)에서 머물고 있던 중 눈사태에 휩쓸려 1,00m 아래 빙하로 추락하면서 비통하게 막을 내렸다. 이런 사고 속에서도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루트로는 2개 팀 21명이 도전해 11명이 등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김해 플라잉점프 원정대는 김재수 대장과 10명이 등정해 단일 팀 최다 등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등반에서 송귀화는 59세로 한국 여성 최고령 등정자가 되었으며, 고미영(2009년 여름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추락사)은 스포츠클라이머에서 고산 등반가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었다. 경남 양산의 이상배는 그동안 네 차례에 걸친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청소등반대에 참가한 다섯 번째 원정에서 등정에 성공했다.

2008년은 중국 당국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베이징 올림픽성화 봉송을 이유로 갖가지 제재를 가함에 따라 티베트 쪽뿐만 아니라 네팔 쪽 등반도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네팔 쪽은 제3캠프(6,800~7,000m), 티베트 쪽은 제2캠프(7,700m)를 끝으로 성화 봉송 팀이 등정에 성공하기를 기다려야 했고, 결국 5월 8일성화 봉송 팀이 등정에 성공한 이후에 등정이 시도되었다.

▲ 2009년 박영석 팀이 개척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실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경기도연맹 팀(대장 남상익), 전북연맹팀(대장 현권식), 한국산악회 전북지부 원정대(대장 손영조)는 봄 시즌 7명이 등정에 성공했고, 홀로 원정대를 꾸린 김영미는 경기도연맹과 함께 등정해 오은선에 이어 한국여성으로 두 번째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정인권씨가 등정에 성공했다. 원정대들은 로체에서도 개가를 올렸다. 경기도연맹 팀은 대원 3명이, 전북연맹 팀은 대원 2명이, 그리고 한산 전북지부 팀은 대원 1명이 로체 등정에 성공했다.

2007년 봄, 촉망받는 산악인 오희준과 이현조 대원을 눈사태 사고로 잃은 박영석 남서벽 원정대는 기후가 안정적인 봄 시즌 대신 눈이 많은 가을 시즌 등반에 나섰다. 이는 벽에 눈이 많이 붙어 있으면 등반이 훨씬 수월하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원정은 순탄하게 이어져 해발 8,400m 높이의 제5캠프까지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엄청나게 불어대는 강풍에 텐트를 설치하는 데에 실패하고, ABC(6,400m)에 강풍이 몰아쳐 본부텐트가 파손되는 등 악천후가 지속돼 등반을 접어야 했다.

2009년 세계 최고봉 최난벽에 한국 루트 탄생

2009년은 에베레스트에 ‘코리아 루트’가 탄생했다. 인천연맹 원정대(대장 전병만)는 대원 3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고 같은 날 로체 정상에도 대원 2명이 등정에 성공하는가 하면, 인천대 원정대(대장 유주면) 대원 2명이 정상에 올라 단일 대학으로서 7대륙 최고봉 완등에 성공하는 개가를 올리는 가운데 2007년과 2009년 두 차례의 도전에서 고배를 마셨던 박영석 대장이 대원 3명과 함께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남서벽에 신 루트를 내는 데에 성공한다. 박영석 대장 개인으로는 다섯 번째 남서벽 도전이었고, 1993년 등반에서 남원우, 안진섭 대원이 추락사하고,2007년 오희준, 이현조 대원이 눈사태사고를 당한 바 있기에 더더욱 감격스러운 쾌거였다.

▲ 2007년 남서벽 등반중 사고를 당한 고 오희준 대원과 이현조대원 (오른쪽).

 

2010년 에베레스트 원정은 이상기온에 의한 악천후의 연속으로 시즌 막판에 이루어졌으나 도전한 3개 팀 모두 등정에 성공한다. 정승권등산학교 바름산악회 원정대(대장 윤왕용), 제천 국제한방엑스포 성공 기원 원정대(대장 허영호), 창립50주년 기념 동아대원정대(대장 성기진) 3개 팀은 여느 해와 달리 5월 중순까지도 등정자가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다가 5월 17일 오전 8시40분 허영호 대장과 아들 재석씨를 시작으로 오후 12시 동아대팀의 장재용·김남구 대원에 이르기까지 3개 팀 9명이 정상에 서면서 성공리에 끝났다. 허영호 대장은 이 등반으로 4회째 등정을 기록하는가 하면, 아들 재석군과 함께 오르는 진기록도 세웠다.

이렇게 1977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부터 시작된 한국에베레스트 원정은 지난해 봄까지 73개팀, 119명(2회 이상등정자 중복 합산)이 세계 최고봉 정상에 서는 데 성공했다. 그중 허영호가 4회 등정(1987년 동계 4등, 1993년 횡단등반,2007년 남동릉, 2010년 남동릉)으로 한국 최다 등정을 기록하고 있고, 엄홍길(1988년 남릉, 2002년 남동릉, 2003년북릉~북동릉)과 박영석(1993년 남동릉, 2006년 횡단등반,2009년 남서벽 신루트), 이 3회 그리고 이인(1997년 북릉~북동릉, 2002년 남동릉), 박무택(2002년 남동릉, 2004년 북릉~북동릉 등정 후 하산 중 탈진사), 김재수(1990년 남동릉,2007년 북릉~북동릉) 등의 산악인이 2회 등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 사이 목숨을 잃은 산악인도 여러 명이다. 1986년 크로 니산악회 남서벽 원정대 셰르파가 등반도중 추락사를 처음으로 2007년 남서벽 원정대 대원 2명이 사망한 사고에 이르기까지 대원 8명이 목숨을 잃고, 등반을 도와준 셰르파 4명이 사고를 당했다.

에베레스트에는 2009년 박영석 원정대의 남서벽 신 루트를 포함해 18개 루트와 5개의 변형루트가 개척돼 있다. 그러나 등정자뿐 아니라 대다수의 원정대들은 노멀루트로 등반에 나섰다. 1995년 남서벽 보닝턴 루트로 한국 초등에 성공한 경남연맹 원정대, 2009년 남서벽에 새 길을 낸 박영석원정대 정도만 난도 높은 루트를 택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원정대들은 특별한 등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네팔 쪽 남동릉이나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노멀루트를 따랐다. 더욱이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상업등반대가 2000년 들어 대폭 늘어나면서 정상까지 로프가 깔리는 것은 물론, 대원과 셰르파가 짝을 지어 등반을 펼치면서 등정률뿐 아니라 안전도 역시 높아졌다는 게 전문 산악인들의 판단이다.

아마추어 가세로 세계 최고봉 등정 붐 더욱 뜨거워질 듯

2011년은 모처럼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한국 산악인이 없는 해다. 그렇다고 에베레스트를 향한 한국 산악인들의 행렬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내년 봄에는 서울 농대산악회가 창립50주년을 기념해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설 계획이다. 지난봄 안나푸르나 등정으로 12개 고봉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김창호(몽벨 기술자문·서울시립대 OB)씨 또한 가을 시즌 초오유 등반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내년 봄 14개 거봉 무산소 등정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마무리지을 계획이다.

소속이 없거나 혹은 아마추어로 활동해 온 등산인들 가운데에도 세계 최고봉을 오르려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까지 가세한다면 에베레스트를 향한 행렬은 더욱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게 산악계의 전망이다. 1977년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반대에 참가했던 김병준 전 대한산악연맹 감사의 말마따나 이제 에베레스트는, 특히 노멀루트는 전문산악인의 손을 떠나 아마추어 산악인들을 위한 도전의 대상으로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및 웹사이트 <역동의 히말라야>, <산악연감> 2008(제9호)·2009(제10호)·2010(제11호), <다이내믹 부산 2006 에베레스트 원정 보고서>,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

 

“베이스캠프부터 정상까지 거의 완벽한 가이드”
       유명 상업등반대들, 남동릉 루트로 쏠림 현상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서 이루어진 상업등반은 1985년 봄시즌 네팔 남동릉 루트를 통한 등반대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의 아르네 내스(Arne Naess)가 이끄는 모집등반대 명칭은 스노버드 에베레스트 원정대 1985(Snowbird Everest Expedition - 1985)였다. 이 등반대의 고객 중 영국인 1명, 노르웨이 6명, 미국인 2명이 등정에 성공했고, 고용된 네팔 셰르파 7명도 고객과 함께 정상에 올라섰다.

이때 참여한 고객 중 미국 유타주의 스키리조트 회장이며 거부(巨富)였던 딕 배스(Dick Bass)도 등정에 성공하였다. 등정시 딕 배스의 나이는 55세였으며,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최초의 7대륙 최고봉 완등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딕 배스는 7대륙 최고봉 등반기 <세븐 서밋>으로 국내 산악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등정자 중에는 고객으로 참여한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Christian Bonington)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등반대가 최초의 상업등반대라는 형식을 빌었다고는 하나, 딕 배스는 1982년과 1983년에는 미국대의 일원으로, 그리고 1984년에는 네팔경찰 에베레스트 청소원정대에 5만 달러를 지불하고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타의 기록을 바탕으로 보면 공식적으로 에베레스트 상업원정대가 언제부터, 누가 시작했느냐의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움이 많다. 용어적인 문제이지, 이전에도 비슷한 형태의 등반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외국 상업등반대의 손님대원들이 베이스캠프 식당 텐트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90년 초, 팀 수 제한제도 폐지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

히말라야에서 8,000m급 상업등반대(모집등반대)를 처음 시도한 것은 1970년대 후반 독일에서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알프스에서 가이드 등반이 대중화의 길을 걸으며 체계적으로 조직화되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히말라야 가이드 등반은 시대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문화적 토대와 여러 면에서 다른 서양의 문화와 사고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서양의 문화는 조직, 클럽 등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활동에 익숙한 우리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직문화 의식이 희박한 서양인들 사이에서 꿈의 대상이었던 히말라야 등반은 전문산악인조차도 자체적인 팀을 구성해 등반하려면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일정액을 부담하더라도 조직화되고 상업적인 업체의 도움을 받아 동경의 대상이었던 히말라야에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인 환경을 고려하면 상업등반대라는 용어의 정리가 분명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실질적으로 ‘상업등반대(Commercial Expedition)’라는 용어를 서양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가이드 등반대, 프로젝트 등반대, 모집 등반대라는 불분명한 형태의 용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용어 자체도 필요 없는 모집등반의 형태가 히말라야 등반대에서의 상업등반대라는 용어의 효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히말라야에서의 모집등반은 시대를 거치면서 히말라야에서의 등반행위는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일부의 특정한 전문산악인의 영역이 아니라 일반 대중, 즉 아마추어 산악인에게도 기회가 제공되는 계기로 발전한다. 특히 3대 극지 중의 하나인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모험을 하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가 활성화되는 크나큰 계기가 된 시점은 네팔 정부의 에베레스트 입산허가에 대한 인원과 팀 수에 대한 제한을 없앤 1990년대 초가 시발점이었다. 미국 업체인 스코트 피셔(Scott Fisher)의 마운틴 매드니스(Mountain Madness), 뉴질랜드 업체인 로브 홀(Rob Hall)의 어드벤처 컨설턴트(adventure consultants), 미국 업체인 토드 벌레슨(Mr, Tod Burleson)의 알파인 어센트(Alpine Ascent International), 뉴질랜드 업체인 러셀 브라이스(Mr, Russel Brice)의 히말라얀 익스피리언스(Himalayan Experience), 러시아 업체인 세븐 서밋(Seven Summits), 영국 업체인 재기드 글로브(Jagged Globe)가 모두 1990년대 초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토드 벌레슨의 알파인 어센트(Alpine Ascent International)는 1990년 봄 시즌부터 국제적으로 공개 모집해 에베레스트 등반 안내 서비스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업등반대를 이끄는 등반대의 리더와 가이드들은 알프스와 히말라야에서 수많은 등반경험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8,000미터급 등반을 여러 차례 하였던 전문산악인들이다.

로브 홀의 어드벤처 컨설턴트의 고객으로 참여하여 에베레스트 등반의 실상을 냉혹하게 그려냈던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의 저자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스콧 피셔와 로브 홀은 1996년 상업대를 이끌며 등반 중 고객과 함께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하였지만, 로브 홀은 1980년에 네팔의 아마다블람을 러셀 브라이스와 등정한 이후 히말라야에서 수많은 등반활동을 하였다.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5회 등정하기도 하였다. 세르파 중에는 ‘에코 에베레스트 원정대(ECO Everest Expedition 2011)’를 이끄는 네팔의 아시안 트레킹 상업등반대 리더 아파 셰르파(Apa Sherpa)는 올봄 등정으로 에베레스트에서 총 21회 정상등정 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1990년 초에 시작된 상업등반대 대부분은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형태로 발전해 높은 등정 성공률을 자랑하며 완성도를 넓혀가고 있다. 20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였고, 경험과 발전된 등반장비 그리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활용해 경이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업등반대는  네팔 남동릉 루트 전문업체와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 전문업체로 나뉘어 더욱 전문성을 가미하는 형태로 진화해 왔다.

통계적으로 상업등반대를 통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률은 경이로운 수치를 나타낸다.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에 참여하는 산악인들 가운데 등정자 수는 매년 수백 명을 상회하고 있다.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자는 모두 636명으로 이들 대부분은 상업등반대를 통해 등정을 이루었다. 2010년도 에베레스트 등정자 512명 역시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초등부터 2010년 말까지 에베레스트 등정자 수는 세르파와 상업등반대 가이드를 포함하여 5,000여 명에 이르며,최고령 등정자는 76세의 네팔인 민 바하두르 세르찬이다.

손님 대원 1인당 참가비는 7만 달러 안팎

현재 대표적인 네팔 쪽 상업등반대는 알파인어센트(www.alpineascents.com), 마운틴매드니스(www.mountainmadness.com), 어드벤처컨설턴트(www.adventureconsultants.com), 히말라야 익스피리언스(www.himex.com), 알엠아이가이드(www.rmiguides.com) 등이 가장 활발하고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1인당 참가비용을 6만5,000~7만 달러를 받고 있다. 상업등반대 업체마다 금액이 다른 것은 지급되는 산소통의 수, 산소와 레귤레이터의 고급 여부, 그리고 대원당 가이드 수, 셰르파 수 등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서비스의 차이인 것이다. 참고로, 가이드는 서양의 전문 산악인으로 구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에베레스트 등정 경험이 있는 셰르파를 가이드 형태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유념할 사항 중의 하나다.

2011년 현재 가장 비싼 업체로 알려진 알엠아이가이드는 1인당 7만4,000달러를 받는다. 이 업체는 대원 1명당 셰르파 1명이란 점에서는 일반 업체와 대동소이하나 대원 2인당 등반 가이드 1명을 배정한다는 게 다른 점이다. 어드벤처컨설턴트는 참가비용이 1인당 6만5,000달러이나 산소사용에 대한 비용을 제외시킨 금액으로 산소사용은 별도 옵션으로 구성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러셀 브라이스(Russell Brice)의 히말라야 익스피리언스는 7만3,000달러를 받는다. 히말라야 익스피리언스는 티베트 북릉~북동릉 상업등반을 통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티베트 쪽의 행정 시스템 문제와 예측 불가능한 중국인들의 횡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최근 들어 네팔 남동릉 루트를 통한 상업등반대를 주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최근에는 에베레스트와 로체봉 2개봉 등반을 연속 등정하는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비용은 8만5,000달러. 아이스폴 지대를 통과해 C2(6,400m)까지만 등반하는 프로그램으로 1인당 1만 달러의 상품도 만들어져 있다.

참가비용에 대한 일반적인 포함사항은  에베레스트 입산료와 행정료, 국내선 항공료, 등반공동장비, 텐트, BC 및 등반 식량, 키친세트, 대원 1명당 셰르파 1명(정상 등정일), 대원 4~5명당 1명의 가이드, 산소 6통(4리터 : 러시아 포이스크사), 마스크와 레귤레이터 1세트(러시아 포이스크사 또는 영국 탑아웃사 제품), 무전기, 그리고 BC 의료서비스, 기상예보, 이메일, 인터넷, 위성전화, TV & DVD 등이 포함되어 있다.


 

참가비용에 포함되지 않은 사항은 네팔 카트만두까지의 국제선 왕복항공료, 카트만두 호텔비용과 시내에서의 식사비용, 네팔 입국비자, 개인장비, 개인 세르파에 대한 정상등정 보너스 등이다. 참가비용은 대부분이 예약 시 약 30%를 받으며(예약금은 환불 불가), 잔금은 카트만두 도착 120~180일 전에 완납하도록 되어 있다.

전체 등반 일정은 카트만두를 출발해 등반 후 카트만두 도착까지 61~65일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카트만두 출발 시기는 매년 3월 24일경부터 4월 1일경이다.

매년 에베레스트 남동릉 루트 초등은 5월 초 이루어진다. 이는 SPCC(사가르마트 환경보호위원회)에서 전담하는 아이스폴 루트(BC~C1 상단) 작업이 완성되는 시기가 4월 중순 이후이고, 전 구간 고정로프가 깔리는 시점이 5월 초이기 때문이다. 2011년 에베레스트 시즌 초등은 5월 5일이었다. 대부분의 상업등반대는 5월 10~25일을 등정 디데이로 잡고 등반계획을 수립한다.

평균적으로 매년 5월 10~25일이 등정에 가장 좋은 날씨로 기록되어 있다. 1990년대에는 5월 15일 이전에 등정이 이루어졌으나, 2000년 이후부터는 등정이 5월 15일 이후로 이루어졌다. 이는 기상이변과 기후변화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표2참조)

 

정해놓은 기준에 미달하면 7만 달러짜리 손님도 탈락

상업등반대는 BC와 고소캠프에서 모든 식량을 제공한다. 대원들의 컨디션 유지와 등반 성공을 위하여 식단 구성에 만전을 기한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제공하고,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중심으로 과학적이고 균형 있는 식단을 제공한다. 자국에서 공수한 연어훈제, 치즈, 그리고 와인 등이 곁들인 풍성한 식단도 그중 하나다. 대개 해발 6,400m대에 설치되는 C2에도 BC와 같이 전문 요리사가 배정된다.

아울러 높은 고도에서 소화에 가장 좋은 식품을 선택한다. 이는 오랜기간 경험을 통해 얻어진 식품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얻어진 결과이다. 고소식량에 대한 경험적인 분석과 데이터는 여타의 히말라야 원정대도 참고할 정도이다. 요리사는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바 있는 경험자이며, 등반에 필요한 식단에 대해 교육을 받은 사람을 고용한다. 특히 위생 관념에 세심한 주의를 강조한다.  상업등반대 대부분이 제공하는 음식류는 철저하게 칼로리를 계산하고 수분 보충에 필요한 요소를 적절히 적용하여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


▲ 베이스캠프의 텐트에 플래카드를 설치하여 주기도 한다. 왼쪽의 사람은 위성전화를 사용하는 중이다.

 

상업등반대 업체가 참여자의 등정률과 함께 가장 비중이 높게 신경 쓰는 부분이 캠프 생활에 대한 것이다. BC는 최대한 편안하게 쉬면서 충전하는 곳이다. 이러한 휴식과 충전을 위한 준비는 대원들의 등정률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러 업체가 상주하다 보니 업체의 우월성과 서비스의 비교 우위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BC에는 다양한 식사뿐만 아니라 온수 샤워도 가능하다. 솔라 시스템과 발전기를 통한 전원공급으로 이메일, TV & DVD 시청이 가능하며, 위성전화를 통해 고국의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는다. 대부분의 업체가 BC에서는 1인 1텐트를 사용하며, 해발 6,400m 높이의 C2에는 대원 2인당 1텐트, C3(7,200m)와 C4(7,950m)에서는 대원 2~3명당 1동의 텐트를 사용한다. BC와 전진베이스캠프인 C2에서는 가스히터를 갖춰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아이스폴 지대를 통과하는 방법을 고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의 가장 큰 장점은 등반에 따르는 여러 가지 과학화된 시스템과 함께 참가자에 대한 적절한 고소순응 시스템 적용과 캠프 운용이다. 이는 등반 스케줄 관리에 대한 다양하고도 많은 경험이 축적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참여자 각자에 맞게 적용해 등정률을 높인다. 산소포화도 수치와 혈압, 그리고 맥박 등을 체크해 대원들의 몸 상태를 관리하고, 캠프 간의 이동에 대한 시간 측정을 통해 캠프에서의 체류시간과 캠프까지 몇 차례의 업다운이 필요한지도 파악해서 조절해 준다.

이러한 데이터 분석은 참여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몸 상태를 가늠하게 한다. 특이한 사항 중 하나는 분석되고 측정된 데이터에서 적정수치에 미달 시 정상 등정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 예로 베이스캠프에서 캠프1 또는 캠프2까지의 운행시간을 측정하여 기준치에 여러 번 미달시에는 등반대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사전에 상업등반대와 참여자가 계약서 상으로 명시해 문제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

산소 장비와 셰르파 추가되면 비용 더 내야

기본적으로 셰르파 1명당 멤버 1명의 비율로 구성하나 이는 대부분 등정하는 날에만 해당되고, 셰르파들은 하이캠프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 수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대원 4~5명당 1명의 전문 등반가이드가 운행을 같이 한다. 등반 가이드는 기본적으로 에베레스트 정상등정 경험이 여러 번 있는 사람으로 구성한다. 등반 가이드 없이 네팔 셰르파만 이용하는 등반대의 경우 등정률은 현저히 떨어짐을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표3 참조).


 

등반용 산소는 러시아의 포이스크(Poisk)사 제품을 대부분 사용하며, 마스크와 레귤레이터 세트는 영국회사 탑아웃(Top Out)사 제품을 사용한다. 이 두 개의 제품은 서로 호환이 가능하다. 탑아웃사의 마스크와 레귤레이터는 기존 러시아 포이스크사의 마스크와 레귤레이터 제품보다 효율이 상당히 높다. 산소통은 대원 1인당 6통, 셰르파 1인당 3~4통의 산소를 준비해 준다. 지급되는 산소 이외에 추가로 원할 때는 산소 1통당 약 700달러를 내야 하며, 하이캠프까지 운반비용으로 1통당 150달러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기도 한다.

산소는 캠프3(7,500m)에서부터 주로 사용하며, 운행할 때와 수면 시에 제공해 준다.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 콜(7,950m) 이후는 대개 3통을 사용케 한다. 즉, 정상 등정 시 1통, 하산 시 1통, 그리고 수면 시 1통이다. 수면 시에는 ‘0.5~1, 운행시는 1.5~2.5를 게이지 기준으로 한다.

참고로, 러시아 포이스크사 산소통은 대부분이 카트만두 시내의 공장에서 산소를 리필한 제품이지만, 대부분의 등반대들은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 이상에서는 러시아에서 직접 공수한 새 상품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일부 등반대에서 리필된 산소를 이용해 정상등정에 나섰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상업등반대마다 비용의 차이가 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산소인데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 그리고 리필된 산소인지 꼭 확인해야 한다.

의료 문제의 경우, 네팔 남동릉 BC에서는 파견된 상주 의료팀과 계약하여 이용하며, 북쪽의 경우 대부분 의사를 대동한다. 응급의료용으로 가모백을 준비하고 예비용 산소와 마스크 & 레귤레이터를 비치해 놓으며, 기본적인 응급조치에 필요한 의약품을 준비해 둔다.

히말라야 등반에서의 기상예측은 등반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때문에 거의 모든 등반대는 기상예보업체와 계약해 매일같이 기상예보를 전송받고, 예측된 기상예보를 바탕으로 일정을 조정한다. 기상예보의 정확도는 매우 높은 편이며 일자별, 시간별로 풍속, 기압, 온도, 적설량까지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다. 또한, 기상예보업체에서 제공해 준 기상예보와 주변의 다른 상업등반대에서 받은 각각의 기상예보를 비교 분석해 정확도를 높이기도 한다. 등반보험은 참여자에게 강력하게 권하는 추세이고, 일부 업체들 중에는 등반보험이 가입이 필수 조건이다. 보험가입이 안 된 경우에는 참여 자체가 불가능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 상업등반대가 사용할 짐 포장작업.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 등반 업체 급속도로 줄어들어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상업등반대의 시스템은 네팔 쪽 남동릉 등반대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하나, 루트의 특성과 어프로치의 차이로 인해 구별된다. 북릉~북동릉 등반대의 일부는 티베트의 성도인 라싸(3,500m)를 통해 캐러밴을 시작한다. 이는 고소적응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다.

카트만두에 모인 대원들은 비행기를 타고 라싸까지 날아간 다음 차량을 이용해 BC에 접근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실제적으로 네팔-티베트 국경인 니알람을 통해 BC에 접근하는 방식보다는 수월하게 고소적응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등반대 중에는 라싸를 통한 캐러밴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를 이용하는 등반자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를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비용적인 면과 안전성이었다. 또한 실질적인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ABC(Advanced Base Camp, 6,400m)까지 야크를 이용해 짐을 수송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캠프운용에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네팔 남동릉 루트는 거대한 아이스폴 지대의 크레바스, 캠프 운용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보다 약간은 어렵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이는 개인적인 견해차가 크며, 체력이 바탕이 되는 젊은 층은 티베트 쪽을 선호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의 마지막 캠프인 C3(8,300m)에서 정상까지의 북동릉이 상당히 길고, 티베트 고원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맞으며 등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 루트가 쉽고 더욱 어렵다라는 비교로의 단정은 쉽게 내릴 수 없다. 개인적인 편차가 워낙 크고 등반 당시의 기상상태나 여러 조건이 항시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4,900m 로부체 아래 평원에 BC를 설치한 외국 상업등반대.

 

티베트 쪽의 등반비용은 점점 인상되는 추세이다.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등반을 계기로 대폭 인상된  금액은 내릴 줄을 모른다. 참고로,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로의 등반에는 고용한 네팔 세르파, 네팔 요리사 등도 입산료 일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 정부의 티베트 사태를 빌미 삼은 일관성 없는 정책과 예측 불가능한 횡포, 합리적이지 못한 추가비용 요구 등이 많은 참가자와 상업등반대를 곤욕스럽게 하고 있다. 히말라야 익스피리언스의 경우는 2008년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를 통한 등반으로 많은 고객을 확보했으나, 등반시일이 임박해 중국 정부가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을 위해 입산자체를 불허한다고 통보해 와 매우 어려운 경우를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로 많은 업체와 고객들은 서서히 티베트 쪽보다는 네팔 쪽을 선호하는 게 최근 추세다. 올해 봄 에베레스트 등반도 네팔 쪽 루트는 25개 팀이 등반하였으나 티베트 쪽 루트는 8개팀만이 등반했다. 2010년 네팔 22개 팀, 티베트 9개 팀, 그리고 2009년 네팔 26개 팀, 티베트 11개 팀으로 점점 네팔 쪽을 선호하는 추세다.

2011년에도 티베트 사태를 이유로 티베트 국경이 4월 초에 일시 개방했다가 폐쇄되어 4월 10일경에 국경을 통과하려던 스페인 원정대는 다시금 국경이 개방된 4월 16일이 돼서야 카트만두를 출발할 수 있었다.

티베트 북릉~북동릉 루트 등반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상업등반대는 7서밋-클럽(www.7summits-club.com), 프로젝트-히말라야(www.project-himalaya.com), 어드벤처피크(www.adventurepeaks.com), 서밋클럽(www.summitclimb.com) 등이며 등반비용은 대부분 1인당 4만 달러를 받고 있다. 등반기간은 네팔 남동릉 루트와 비슷하나 60일 전후로 전체 일정이 구성되어 있다. 등반의 시스템이나 고용인, 그리고 산소사용에 대한 원칙은 대부분 네팔 남동릉과 비슷하게 구성된다.


▲ 본부텐트에는 노트북, 전화기 등을 설치하여 각종 데이터를 받고 분석한다.

 

한국에서의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상당히 경직돼 있다. 순수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반행위에 상업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일에 대해 많은 우려와 질타가 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면 한국의 에베레스트 등반은 상업등반보다 우월한 형태였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대부분 노멀루트를 통해 등반이 이루어져 왔고 등반의 행태 또한 상업등반대의 그것과 흡사했다. 셰르파를 적극 활용해 등반을 진행했고, 산소를 사용했다. 어쩌면 상업등반대보다 시스템 상으로나 친환경적인 측면, 그리고 과학적인 면에서도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등반행위에 있어서, 더군다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순수 알피니즘과 순수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절대적인 사항이지만, 상업등반대를 이용했다고 하여 개인의 순수성이 오염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인들 중에는 서양의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나 네팔의 대행업체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상업등반대에 참여한 예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차이 언어문제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는 음식에 대한 차이로 인하여 곤란함과 어려움을 겪곤 하였다.


▲ 뜨거운 샤워를 위한 순간 온수기.

 

2011년 현재 봄 시즌 네팔 남동릉 루트에는 인터내셔널마운틴가이드(www.mountainguides.com) 업체를 통하여 뉴저지에 거주라는 미국 교민인 51세의 한국여성이 참여하여 등반을 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업체인 인터내셔널마운틴가이드는 올 시즌 상업등반대 중 가장 많은 33명의 고객이 참여하였다.

필자는 2008년 11월 19일에 서울의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2009년 봄 시즌을 겨냥한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 설명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지는 설명회였다. 등반대로의 성사는 비록 이루지 못하였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주지해야 할 사항이었다. 적극적으로 참여와 관심을 표방한 분이 100여 명이 넘었다.

이들 중에는 한국의 산악계에 널리 알려진 분도 있었으며, 전문산악인 또한 많은 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에베레스트 등반에 강한 의욕을 가졌으나, 그 기회를 갖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존재하였음을 이야기하였다. 한국의 여타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합류하기에는 제약조건이 많았고 스스로 팀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부담감이 컸다는 것이다.


▲ BC와 C2에서 사용하는 가스히터의 모습.

 

이러한 일련의 상황으로 보면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반인이며, 아마추어 산악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외국의 상업등반대에 참여하는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름대로 등반기술과 체력을 오랜 기간 키워왔으며, 이전에 고산에서 여러 번의 등반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일 각오, 세계 최고봉 정상등정이라는 꿈에 대한 강한 열정과 노력은 전문 산악인 못지않다. 이러한 준비를 바탕으로 하여 참여한다.

아울러 상업등반대를 이용하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손쉽게 올라간다는 인식과 사고는 절대적으로 버려야 될 사항이다. 분명 참가자 스스로의 노력과 체력 그리고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준비한 사람만이 정상등정의 영예를 얻을수 있다. 상업등반대의 역할은 복잡한 행정처리를 대신하여주고, 등반에 대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시스템을 만들어주어 참여자로 하여금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가이드나 셰르파 역시 조언과 도움을 주는 역할 이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도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고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참가자가 스스로의 다리와 힘으로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상업등반 형태는 국내외 어디에서나 부정적인 논란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운영하는 상업등반대의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임감 그리고 과학적인 시스템도 중요한 사항이지만 참여자는 나름의 등반철학과 동기부여, 그리고 전문산악인 못지않은 훈련과 체력을 배양한 후에 참여하여 기대치의 목표를 달성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 할 때 이러한 부정적인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전문산악인이든 아마추어산악인이든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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