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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현(鳥取縣)은 아직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곳은 아니다. ‘돗토리’라고 하면 지명보다는 산에서 볼 수 있는 먹는 ‘도토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총면적 3,507㎢, 인구 60만 명이 채 안 되는 이 작은 현은 도쿄나 오사카처럼 번화하거나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지만 독특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빚어낸 작품들로 여행객을 조용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는 곳이다.
가장 추웠던 지난 12월 말 기자는 돗토리현을 찾았다. 여행하기에 친절한 날씨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넓고 깊은 동해를, 그것도 장장 15시간 동안 배로 건너왔기에,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저 마음 편하게 즐기기로 했다.
- ▲ 쉽게 산의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는 효노센. 사람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효노센의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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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만화’에 등장한 요괴 캐릭터가 살려낸 사카이미나토市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境港)시는 요괴(妖怪)가 살려낸 작은 도시다. ‘미즈키시게루 로드’라는 이름의 800m쯤 되는 거리 안의 풍경은 요괴들로 가득하다. 빼곡히 들어선 가게 안을 가득 채운 갖가지 요괴 모양의 캐릭터 상품들,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요괴 모양 청동상들, 군것질거리들도 요괴 모양이 한 가득이다. 800m 길이의 거리 안에서는 요괴들이 주인공이다. 관광객들은 그 풍경들을 구경하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사카이미나토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도시 기간산업의 쇠퇴와 인구 감소로 도시 전체가 커다란 불황의 늪에 빠져버린다. 이 때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시의 한 공무원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그 지방 출신 만화가 미즈키시게루(水木しげる)의 요괴만화 <게게게노키타로(ゲゲゲの鬼太郞)>를 내세운 관광 상품 개발이었다. 그리고 마을을 사랑했던 미즈키시게루라는 작가는 요괴 거리를 조성하는 데 캐릭터 저작권을 무상으로 양도했다고 한다.
- ▲ 게게게노 키타로의 주인공 ‘키타로’의 청동상이 여기가 미즈키시게루 로드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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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800m 거리 안의 모든 것들을 만화에 나오는 요괴들로 캐릭터화했고 120여 개의 요괴 모양 청동상이 세워졌다. 고향을 사랑하는 지역민들의 사랑으로 미즈키시게루 거리는 탄생하게 되었고,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다. 그로 인해 덩달아 펜션, 호텔 등 숙박업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지역민들의 현에 대한 사랑으로 요괴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는 대성공했다.
오후 시간, 돗토리 사구를 찾았다. 가이드 황진우(29)씨의 말에 따르면, 사구를 빼놓고는 돗토리를 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유명한 곳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하필이면, 도착하자마자 잿빛으로 변해 불안해 보이던 하늘에서 기어이 엄청난 바람과 함께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불안했지만 우리 한국인의 기질 그대로, 유명하다는데 돌아보지 않을 수 없어 옷을 단단히 고쳐 입고 따가운 우박을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박의 크기가 아프기만 하고 상처가 나지 않을 만큼의 사이즈란 점이다. 참 얄밉다. 나를 삼킬 듯 밀어내는 바람의 위력에 한없이 이끌리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사구의 가장 높은 부분에 올라 있었다.
이 사구는 독특했다. 언뜻 보면 영락없는 사막(沙漠)의 모습이다. 곱디고운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만 본다면 말이다. 여기서 시야를 조금만 더 넓히면 바다가 보인다. 고운 모래언덕을 조금 올라가다 보면 탁 트인 바다로 또 한번 시야가 훤해진다. 앞에 보이는 바다는 동해(東海)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날 수 있는 바다다.
이 모든 게 자연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고 한다. 돗토리 사구는 최대높이 48m, 동서 16km, 남북 2.4km에 걸쳐 펼쳐지는 일본 최대의 사구다. 센다이강의 모래 위에 다이센산의 화산재가 쌓이고, 거기에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힘에 의해 약 10만 년의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다. 모래와 바람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시간이 만들어낸 걸작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사하라사막에 비한다면 너무 작은 면적이겠지만 10만 년의 세월이 전해오는 조용한 ‘울림’이 느껴지는 듯하다. 일본의 많은 문인들은 돗토리 사구를 보고 자연에 대한 시와 노래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 ▲ 해풍과 함께 사구는 살아 움직이고, 바람의 흔적이 모래 위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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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노센은 ‘야생이 살아 있는 산’
다음날 아침, 효노센((氷ノ山·1,510m)을 올랐다. 효노센은 돗토리현과 효고현 사이에 위치해 있는 국정공원이다. 국정공원은 일본의 공원제도로서 국립공원에 준하는 자연공원이다. 돗토리현에서는 다이센(大山)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사카이미나토항에서 차를 타고 3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효노센은 여름에는 등산객, 겨울철엔 스키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전날 밤에 엄청나게 눈이 내리더니 산행 당일에도 날씨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번개주의보까지 내렸다고 한다. 산행을 위해 일부러 찾은 곳인데 날씨 때문에 접고 돌아갈 수는 없다. 일단 되는 데까지만이라도 올라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함께한 가이드 황진우씨와 일본인 산악 가이드 오노 아츠무(53)씨가 동행했다.
일본인 가이드 오노상은 효노센을 한마디로 ‘야생이 살아 있는 산’이라 표현했다. 요즘 환경에는 어쩌면 쉽게 찾아가기 힘든 게 진짜 자연, 야생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한다. 일행들을 앞서 걷고 있는 오노상의 허리춤에 딸랑이는 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 ▲ 과자의 성이라 알려진 ‘고토부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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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노센에는 유난히 많은 야생 곰이 서식하고 있는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곰과 사람의 ‘잘못된 만남(?)’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겁이 많은 기자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은 만남이다. 오노상은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리 벅찬 산은 아니라고 하지만 눈이 많이 쌓여 있어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효노센을 소개하는 산악전문 여행사 무아원(cafe.daum.net/muawon·02-2285-2585) 박태길 사장의 눈빛은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오지에 속하는 장소를 소개한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더불어 지난여름 찾았던 효노센과 180도 다른 겨울 효노센을 다시 오른다는 설렘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산을 개척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효노센은 ‘월척’이다.
“삼나무에서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아세요? 이런 곳에 와서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웰빙입니다.”
삼나무에 눈이 내린 설경을 감상하고 숨쉬는 것만으로도 효노센은 와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산이라고 한다. 그는 효노센에 푹 빠져 있었다.
일본이 원산지인 삼(杉)나무는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나무다. 일본의 산야에 조림용으로 심어 놓은 것이 대개 삼나무라고 한다. 쓰임새 또한 다양해 가구나 건축재로 많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30년 정도 키우고 벌채를 한다. 벌채된 삼나무는 일본 전통 다다미방에 깔기도 하고 고급 가구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일본인에게 사랑받고 신성시되는 삼나무이지만 봄철에는 한 가지 골칫거리를 안겨 주기도 한다. 바로 ‘화분증’이라는 병인데 꽃가루를 마시면 걸리는 병이다. 알레르기 체질의 사람이 오랜 기간 삼나무 화분을 마시면 면역반응이 과도하게 일어나고 눈과 코 점막을 자극해서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나 재채기가 멈추지 않게 된다. 일본인의 10명 중 3명은 화분증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화분증의 80%를 삼나무 화분증이 차지하고 있다. 이 기간만 조심하면 삼나무 숲에서 피톤치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 ▲ 돗토리 여행 중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어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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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은 산 중턱에 위치한 야영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야영장은 눈이 많은 겨울에는 잠정 폐쇄된다. 정상까지는 4.4km. 산등성이 너머로 스키장의 모습이 보인다. 10분가량 걸으면 전망대에 닿는다. 왼쪽에 ‘곰 주의’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에 그려진 야생곰의 모습이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워 보인다.
표지판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다. 15분쯤 걸으면 다른 등산로와 합류하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 삼나무가 울창한 숲속길이 이어진다. 다른 계절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겠지만 삼나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계절은 겨울이 아닐까. 눈이 소복이 쌓인 삼나무 숲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풍경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이 있어 삼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삼나무와 함께한 눈은 더 눈 같은 느낌을 주는데 원래 눈의 입자는 곱고 하얗지만 삼나무와 있어 그 사실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그 모습이 참 곱다.
가팔라지기도 했다가 완만해지는 길을 감상하며 40여 분 오르면 첫 번째 대피소가 있는 사거리에 닿는다. 북쪽으로는 하치부세, 타카마루산으로 가는 능선길이 이어지고, 동쪽은 한국의 청계천 같은 효고현 공원으로 내려서는 하산로다. 대피소는 바닥에서 1m 정도 높여서 지었는데 겨울에 내리는 폭설 때문이라고 한다. 돗토리현은 기온이 연중 온난한 편이지만 강수량이 많아 겨울철에는 특히 눈이 많다.
이곳부터는 완만하고 평안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40분 정도 걸으면 계곡으로 내려서는 등산로 하나를 만나는데 그대로 직진한다. 또 10분쯤 걸으면 정면으로 거대한 바위가 눈에 띈다. 시루처럼 생긴 큰 바위를 우회해 15분쯤 더 걸으면 효노센 정상에 닿는다.
하지만, 이 날은 기상악화로 아쉽게도 효노센 정상에 오를 수 없었다. 매정한 날씨가 얄밉고, 부족한 시간이 아쉽다. 사실, 한국이었다면 무리를 좀 하더라도 정상까지 올랐을 수도 있다. 가이드 오노상은 “무리데쓰”를 외치며 하산해야 한다고 한다. 바다 건너 온 손님들이라 더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건지 일본인 특유의 조심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산행을 마치고, 온천에서 약간의 피로를 푼 후, 요즘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아테나’의 촬영장소로도 나왔던 하나미카타 해안묘지에 들렀다. 규모가 상당히 크다. 일본은 어디에서나 납골 묘지를 쉽게 볼 수 있다. 가까운 나라이지만 일본과 한국은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만큼은 확연히 다른 듯하다. 여행기간 동안 유난히 많은 납골 무덤을 볼 수 있었는데 일반 가정집에서 몇 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우리에겐 으스스한 풍경이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따뜻한 여름철에는 납골무덤 앞바다에서 서핑도 심심치 않게 즐긴다고 하니 말이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 ▲ 효노센의 삼나무 군락지. /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며 바라보면 좋을 효노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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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 사막과 온천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돗토리 여행이 끝나가고 ‘과자의 성’으로 알려진 고토부키성에 들렀다. 일본인의 ‘오미야게(御土産)’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일본 어느 곳을 가든지 지역 특산 과자나 기념품들을 많이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국내든 해외든 어딜 가더라도 작은 선물을 사오는데 이를 오미야게(御土産)라고 한다. 고토부키성에서는 돗토리현의 여러 특산 과자를 시식한 후 구입할 수 있다. 시식이 자유로워 이것저것 맛보고 선물용으로 돗토리현의 특산물인 배 맛 나는 과자를 몇 가지 샀다. 일본인의 오미야게(御土産) 문화를 한 번 체험해 보자.
일본 열도 내에서 산(山)과 바다, 사막(沙漠), 온천(溫泉)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은 돗토리현밖에 없을 것이다. 기자는 1박 2일 동안 이 네 가지를 모두 체험하고 왔다.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산, 바다, 사막, 온천을 모두 체험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