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정보

적설기 한라산

김영인 2011. 2. 12. 07:40

       여름과 완전히 다른 상황 펼쳐져…꼼꼼한 산행 준비 필수

 
제주도 한가운데 피어난 거대한 눈꽃송이
       습설이 빚어낸 독특한 눈꽃 풍광 자랑
 


 

남한 최고봉 한라산(漢拏山·1,950m)은 한반도에서도 특이한 자연 환경을 지닌 산이다. 해발 1,950m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겉모습은 단순하다. 무엇보다 화산섬인 제주의 한가운데 순한 모습으로 솟아오른 한라산은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은 듯한 순상화산(楯狀火山·aspite)이다.


때문에 어디서 보든 정상인 부악에서 바닷가를 향해 완만하게 산자락을 펼친 형국이다. 열두 폭 치맛자락으로 제주를 폭 덮은 형상으로도 느껴진다. “제주가 곧 한라산이요, 한라산이 곧 제주”라는 표현 역시 이러한 산세에서 비롯된 것일 게고, 결국 한라산을 빼놓고는 제주도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 폭설 직후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설피를 신고 있는 등산인들.

 

 

독특한 설경 속에 히말라야 원정 위한 훈련장으로 변신
이러한 모습의 한라산은 사철 독특한 풍광을 자아낸다. 해발 0m에서 1,950m에 이르기까지 높이에 따라 저지대의 난대성 식물에서 고지대의 고산식물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는 한라산은 이른 봄 눈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면서 점점 파릇하게 변하고, 여름 문턱에 이르면, 특히 선작지왓이라 불리는 부악 남쪽 아래 해발 1,700m 안팎의 너른 고원은 분홍빛 털진달래꽃과 철쭉꽃이 어우러져 화려한 천상화원을 이룬다.


한라산은 절정의 단풍과 검은빛의 용암석이 뒤섞어 신비감을 자아내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파릇한 상하(常夏)의 남국의 풍광 속에 봉긋 솟아오른 하얀 봉우리 사진과 함께 눈 소식을 전한다. 이 적설기 한라산은 아름답다. 육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멋지면서도 괴이하다 싶은 설경을 보여준다.


바다 습기가 듬뿍 담긴 습설은 강한 바람에 구상나무, 굴거리나무와 같은 나무들뿐 아니라 바위, 더 나아가 백록담 화구벽에 켜켜이 달라붙으면서 아름다움과 독특함은 극에 달한다. 일본 홋카이도나 핀란드처럼 눈 많고 추운 나라에서나 봄직한 풍광이다.


▲ 눈이 켜켜이 쌓인 구상나무 숲길.

 

 

한라산은 멋스럽기만 한 게 아니다. 겨울이면 3m 안팎의 눈이 쌓이면서 히말라야 고산 등정을 목표 삼는 산악인들에게 훌륭한 훈련장으로 탈바꿈한다. 봄 여름 가을엔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구 용진각대피소 부근의 탐라계곡 최상류는 눈이 두터이 덮이면서 베이스캠프로 변하고, 부악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능선 상의 장구목 일원은 러셀과 설벽 등반의 훈련장으로, 북벽 일원은 설동 비박 훈련장소로 탈바꿈한다.


한국등반사에 기록된 최초의 등반사고는 물론 이후에도 간간이 눈사태 사고가 일어난 산이 한라산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 용진각대피소 일원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이루어지는 한라산 적설기 훈련은 대한산악연맹, 한국산악회, 대학산악연맹과 같은 산악단체의 추천을 받은 산악회나 팀에 한해 허용된다.


한라산 산길은 성판악~백록담 동릉 정상(9.6km), 관음사 주차장~백록담(동릉 정상·8.7km), 어리목~윗세오름(4.7km), 영실~윗세오름(3.7km) 코스와 2009년 11월 개방된 돈내코 코스(돈내코~남벽 분기점~윗세오름 9.1km) 등 다섯 코스가 개방돼 있다. 한라산은 최정상인 백록담 서릉 정상으로 이어지는 북벽 코스와 남벽 코스는 자연훼손이 극심해진 이후 오랫동안 복구를 시도해 왔으나 결국 등산로를 폐쇄했다.


▲ 깊은 눈에 덮인 윗세오름대피소.

 

 

백록담 보려면 성판악이나 관음사 코스 따라야
결국 백록담이 바라보이는 화구벽 동릉 정상까지 올라설 수 있는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 두 코스뿐이다. 따라서 백록담을 보는 산행을 하려면 성판악(주차장 해발고도 700m) 코스와 관음사(주차장 630m) 코스를 엮도록 한다. 대개 산길이 1km 가까이 길더라도 출발 기점이 100m 정도 낮고 완만해 산행이 수월한 성판악 코스로 동릉 정상에 올라선 다음 왕관바위와 삼각봉대피소를 거쳐 관음사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영실과 어리목 코스는 오랫동안 윗세오름대피소(1,700m)까지만 등행이 가능했으나 2009년 11월 돈내코 코스가 열리면서 장엄한 풍광을 자아내는 남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백록담 분화구 위까지 이어지는 남벽 등로는 계속 폐쇄되고 있다.


▲ 펜스가 설치된 삼각봉 기슭의 눈사태 지역.

 

 

남벽 분기점으로 이어지는 어리목(970m), 영실(1,280m), 돈내코(510m) 코스 또한 영실 코스기점이 가장 높기 때문에 영실에서 시작해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곧장 내려서든지, 아니면 남벽 풍광을 탐승한 다음 평궤대피소를 거치고 숲길을 따라 돈내코로 내려서는 게 바람직하다. 단, 삼각봉대피소~동릉 정상 구간과 윗세오름~남벽 분기점~돈내코 구간은 폭설 직후 길이 눈에 묻혀 통제할 경우가 있으므로 출발 전 상황을 확인토록 한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는 등산인들의 안전 산행을 위해 일몰 2시간 전부터 일출 2시간 전까지 산행을 금지하고 기점별로 통제시간을 정해놓았다. 11월부터 2월 말까지 동절기의 경우 어리목·영실·진달래밭대피소는 12시, 윗세오름 오후 3시, 동릉 정상 오후 1시30분이다. 따라서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를 엮는 산행을 하려면 동릉 정상에 오후 1시30분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


현재 탐방로가 개설된 구간에는 대피소가 6개소 있다. 그중 윗세오름대피소와 진달래밭대피소는 공원사무소 직원들이 상주하고, 삼각봉대피소는 동릉 정상 통제소와 마찬가지로 등산인들의 안전산행을 위해 주간에만 근무한다. 윗세오름과 진달래밭대피소는 위급 상황이 아니면 묵을 수 없다. 속밭·탐라계곡·평궤대피소는 무인대피소다. 따라서 한라산 산행은 어느 코스를 택하든 당일에 끝내야 한다. 산행 도중 체력이 떨어지거나 장비가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현명하다.


▲ 선작지왓을 가르는 동산벌른내 계곡을 건너는 등산인들. 화구벽 남쪽 일원은 폭설 직후 눈길이 묻히곤 한다.

 

 

윗세오름대피소와 진달래대피소에서 간식거리와 컵라면 같은 요깃거리를 팔고 있으나, 식수 사정이 좋지 않으므로 보온병에 온수를 담아 가는 게 바람직하다. 출발 당시 상황은 인터넷 홈페이지 참조.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www.npa.or.kr) 좌측 중단에 나와 있는 전국국립공원 중 ‘한라산’ 클릭. 또는 각 기점별 안내소나 대피소 및 통제소에 전화 문의.


한라산은 봄가을 건조기 산불예방기간과 관계없이 탐방로를 개방하지만 태풍이나 폭설 등의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는 철저하게 통제한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산중 날씨의 변덕이 매우 심하다. 따라서 일기예보에 관계없이 방풍·방한복은 물론, 방한모와 장갑도 준비하도록 한다. 또한 내리막길은 탐방객들이 미끄럼을 많이 타 전체적으로 얼음판이 져 있으니 아이젠과 등산용 폴을 꼭 지참하도록 한다.


올 겨울 한라산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춥다. 보기 드물게 제주시내 도로가 눈 때문에 교통체증이 일었을 정도다. 올해 들어 1월 20일까지 툭 하면 눈이 쏟아지거나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이 많았다. 때문에 여느 해보다 적설량이 많았고 그로 인해 등산로뿐 아니라 접근도로도 통제될 경우가 많았다.


▲ 깊은 눈을 헤치며 삼각봉대피소로 향하는 등산인들. 삼각봉 동쪽 사면은 낙석뿐 아니라 눈사태 다발지역이다.

 

 

삼각봉 동사면은 눈사태 다발지역
한라산국립공원 직원인 오희삼씨의 말에 의하면 “1월 초 적설량이 2월 초 적설량과 맞먹을 정도”라 한다. 이러한 날씨 덕분에 등산인들에게는 한라산 특유의 설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1월 말, 지금 당장 한라산을 찾더라도 결코 실망하는 일 없이 눈 구경을 실컷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여느 해보다 적설기 산행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스패츠와 아이젠은 물론, 방풍보온의류 준비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진달래밭대피소~동릉 정상, 구 용진각대피소 자리~동릉 정상 구간은 빙판진 경사가 가파르고 강풍이 많이 몰아치는 구간이므로 대비에 철저히 하도록 한다. 특히 눈이 많이 내린 다음에 햇살에 의해 표면이 녹았다 얼어붙으면 이빨이 작은 아이젠의 경우 제동 효과가 떨어진다는 점도 잊지 않도록 한다.


눈이 많이 내린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접근도로가 통제될 가능성도 있고 눈사태 염려 또한 높아졌다는 적신호이기도 하다.  삼각봉 동사면은 눈사태 다발지역이다. 낙석(눈사태) 방지용 펜스를 이중으로 설치해 놓기는 했지만 구 용진각대피소 자리를 지나 삼각봉대피소로 가기 위해 삼각봉 동사면을 지날 때는 삼각봉 정상부 쪽을 살펴보는 게 좋다. 또한 강풍에 의해 한 시간 전 뚫은 놓은 눈길이 사라질 적도 많고, 느닷없이 눈보라가 몰아칠 경우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길을 찾을 자신이 없다면 걸어온 발자국을 되짚어 안전한 대피소로 돌아가는 게 바람직하다.


도로가 깊은 눈이나 심한 빙판으로 차량 통행이 통제되면 걸어야 하는 거리가 예상 밖으로 길어지기도 하는 것이 겨울 한라산이다. 그러므로 사전에 등·하산 지점의 도로 통제 상황을 미리 체크하고 길을 나서야 할 것이다. 또한 산행 중 눈이 내려, 하산지점 쪽의 도로가 통제되면서 뜻밖으로 길게 더 걸어야 하는 경우도 가정해야 한다. 특히 폭설 직후 1100도로 영실 입구에서 영실각휴게소까지 약 5km 구간은 차량통행이 통제될 경우가 많다.


한라산 지역은 휴대폰 통화가 잘 되지 않는 곳이 있다. 한편 겨울에는 중계기가 얼음으로 뒤덮여서인지 대피소 근처에서조차 통화가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여분의 먹을 것, 장갑, 랜턴용 건전지 등은 적설기 한라산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동릉 정상 통제소. 동절기에는 오후 1시30분 이전에 도착해야 관음사 쪽으로 하산이 가능하다.

 

 

▶코스별 거리 및 산행시간(공단 자료 기준)


▶어리목 코스
어리목본소 → 2.4km/1시간 → 사제비동산 → 0.8km/30분 → 만세동산 → 1.5km/30분 → 윗세오름 → 2km/1시간 → 남벽분기점
▶영실 코스
영실휴게소 → 1.5km/1시간 → 병풍바위 → 2.2km/30분  → 윗세오름 → 2.1km/1시간 → 남벽분기점
▶성판악 코스
탐방안내소 → 4.1km/1시간20분 → 속밭대피소 → 1.7km/40분 → 사라오름 입구 → 1.5km/1시간 → 진달래밭대피소 →2.3km/1시간30분 → 동릉 정상
▶관음사 코스
탐방안내소 → 3.2km/1시간 → 탐라계곡 → 1.7km/1시간30분 → 개미목 → 1.1km/50분 → 삼각봉대피소 → 2.7km/1시간40분 → 동릉 정상
▶돈내코 코스
탐방안내소 → 5.3km/2시간50분 → 평궤대피소 → 1.7km/40분 → 남벽분기점


▶본소·지소·안내소·대피소 전화
어리목본소          713-9950(~3)
영실지소             747-9950
성판악지소          725-9950
관음사탐방안내소 756-9950
돈내코탐방안내소 710-6920
윗세오름대피소    010-4988-6902
진달래밭대피소    010-4961-1703


▶입산·하산 시각


▶동절기(11~2월)
입산 △어리목·영실=12:00 △관음사=09:00 △삼각봉대피소=12:00 △진달래밭대피소=12:00 △어승생악=16:00
하산 △윗세오름대피소=15:00 △동릉 정상(정상통제소)=13:30


▶춘추절기(3, 4, 9, 10월)
입산 △어리목·영실=14:00 △관음사=09:30 △삼각봉대피소=12:30 △진달래밭대피소=12:30 △어승생악=16:30
하산 △윗세오름=15:00 △동릉 정상=14:00


▶하절기(5~8월)
입산 △어리목·영실=15:00 △관음사=10:00 △삼각봉대피소=13:00 △진달래밭대피소=13:00 △어승생악=17:00
하산 △윗세오름=17:00 △동릉 정상=14:30

 

 

 

성판악~동릉정상~삼각봉~관음사 입구 18.3km 산행

 

 “벌써 보름째 날씨가 이래요. 폭설이 두 차례나 내렸고요. 1월 초 한라산에 이렇게 눈이 많았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제주시내에 눈이 쌓인 건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이젠 한라산 날씨를 종잡을 수 없네요.”

비행기가 제주도 상공에 접어들 무렵 한라산은 물론 제주는 섬 전체가 두터운 먹구름에 덮여 있었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접어들자 도로 곳곳이 눈으로 어수선했다. 산 위로 올라서면서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한라산 동측을 가로지르는 5·16도로는 엊저녁 쏟아진 폭설로 눈이 잔뜩 쌓여 있고, 성판악 주차장에 내려서자 눈보라는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몰아쳤다. 동행한 제주 오현등고회 회원들은 “1월 날씨치곤 고약스럽다”며 한마디 했다. 그런데도 신년 산행 차 가벼운 복장으로 한라산을 찾은 모 기업 직원들은 활짝 핀 얼굴로 산행에 나섰다.


 

 

▲ 1 켜켜이 쌓인 눈이 자아내는 설경은 한라산만의 독특한 풍광이다. 취재팀이 괴이한 풍광의 설화 숲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동릉 정상~왕관봉. 2 삼라만상을 빨아들일 듯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백록담. 화구벽 동릉 정상에서 바라보았다. 1월 11일 촬영. 3 진달래밭을 등지고 동릉 정상을 오르는 등산인들. 평원처럼 널찍한 산사면에 불룩 솟아오른 사라오름(앞)과 성널오름이 조망의 멋을 한층 드높여준다. 1월 11일 촬영.

 

 

 

잔잔한 수채화 풍의 설경 보여주는 사라오름 전망대

산 안으로 들어서자 빼곡히 우거진 나무들은 속살이 비칠 만큼 얇은 눈옷을 입고 있다. 그러다 높이를 올릴수록 눈옷이 두꺼워지고, 해발 900m를 넘어서자 오버코트처럼 무거운 옷을 입고 있다. 설화숲을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도 각양각색. 너무 힘들었던지 찌푸리거나 화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동화와 점퍼 차림에도 콧노래 흥얼거리며 내려서는 소녀들과 중년 여인들도 눈에 띄었다. 하늘 표정은 가늠할 수 없다. 눈이 켜켜이 달라붙어 크리스마스 트리로 숲을 이룬 듯한 삼나무 숲을 지날 즈음 햇살이 쏟아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짙은 먹구름이 밀려와 산을 집어삼키고 거센 바람이 산을 흔들어댄다.

까마귀 울음소리 들으며 속밭대피소(성판악 4.1km·사라오름 입구 1.7km)에 도착하자 많은 등산인들이 점심과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다. 진달래밭대피소까지 다녀온 사람들은 그나마 밝은 편이지만 백록담 동릉을 다녀온 사람들은 땀에 젖고 눈을 뒤집어쓴 채 사뭇 지친 표정이다. 2009년 여름 전까지만 해도 성판악 코스에는 진달래밭대피소 외에는 쉴 만한 공간이 없어 등산인들이 불편해했는데 이렇게 속밭대피소가 들어선 모습을 보니 다행이다. ‘속밭’은 1970년대 녹화사업 때 제주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삼나무를 심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어요. 동릉에서 용진각 쪽으로 눈이 많아 내려갈 수 없답니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 동릉까지도 4시간이나 걸리고요. 천천히 사라오름이나 구경하시죠. 구름이 터지면 서귀포 쪽도 보이고 백록담 화구벽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사라오름 입구(성판악 5.8km·진달래밭대피소 1.3km)에서 기다리던 오현등고회 박철홍씨는 “백록담 화구벽 동릉 안내소 근무자와 전화 통화한 결과 동릉에서 삼각봉대피소에 이르는 구간에 산길이 나 있지 않다” 한다.

한라산 백록담 동면의 여러 오름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라오름(紗羅岳·1,325m)은 개방된 지 이제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다(2010년 11월 1일 개방). 제주의 330여 개 오름 중 예닐곱 개밖에 되지 않는다는 화구호(火口湖) 중에서도 가장 높이 위치해 있고,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꼽혀 화구호 안에 묘를 쓰기도 했다. 때문에 지금도 날이 가물어 바닥이 드러나면 묘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가 훈련대인데 짐을 벗어놓고 갈 수야 있나. 어서들 배낭 메.”

올 여름 중국 신장성 위구르자치구의 보고타(5,445m) 한국 초등에 도전하는 오현등고회 원정대 등반대장인 박철홍씨는 후배인 정태문씨와 김홍업씨에게 “이것도 훈련”이라며 “배낭을 짊어진 채 사라오름을 다녀오자” 주문한다.

숲 우거진 짤막한 오르막을 올려치자 성판악 산길과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졌다. 눈 덮인 화구호는 요정이라도 살고 있는 듯 신비롭고, 분화호 가장자리로 이어진 트레일을 따라 분화구 반대편 산릉에 올라서자 잔잔한 수채화풍의 산사면이 펼쳐졌다. 서귀포와 태평양 먼바다가 터지고, 한라산 정상인 부악(釜岳) 동면의 웅자(雄姿)를 드러내는 전망대이지만 아쉽게도 눈보라와 짙은 구름은 모든 기회를 앗아가고 말았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면서 산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그런데도 하산객들의 표정은 밝고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곤 한다. 전형적인 엉덩이 썰매 코스. ‘다른 사람들 미끄러지지 않게 미끄럼 타지 말라’ 당부하는 플래카드가 눈에 띄고, 등산인들은 저마다 조심조심하지만 일단 엉덩이 썰매 맛을 본 사람들은 내리막만 눈에 띄면 다리를 쭉 펴고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환호성을 지르며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숲이 벗겨지고 키 작은 진달래나무 군락이 나타나면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까마귀들은 한낮에는 주로 먹을거리가 많은 대피소 주변에서 머문다. 때문에 속밭대피소에 다가설 때와 마찬가지로 ‘깍깍’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달래밭대피소가 다가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헬프미 뽀빠이~. 헬프미”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할 즈음 허재성 기자가 살려 달라 소리친다. 대피소로 다가오는 일행을 촬영하려 등산로를 살짝 벗어났다 깊은 눈 속에 허리까지 빠져들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구조요청을 해댄다. 키 큰 김홍업씨가 다가가 손을 뻗쳐 주지만 커다란 배낭에 무거운 카메라를 멘 허재성 기자는 눈구덩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진달래밭대피소는 입구 양쪽 벽이 3분의 2 이상 눈에 덮여 있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들은 분명 설인이었다. 잠시 쉬면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대피소 안에 텐트를 치는 사이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터진다. 겨울 한라산은 날씨가 나쁘더라도 오후 4~5시면 한 번은 구름이 벗겨져 준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서둘러, 서둘러. 내일 새벽에 그냥 지나칠 구간 사진을 지금 찍어야 해.”

급히 장비를 챙겨 대피소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미 오후 5시를 넘어선 시각. 마음은 동릉 너머 백록담에 꽂혀 있지만, 구름이 벗겨지면서 모습을 드러낸 햇살은 이미 노을빛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니, 이 시간에 어딜 가요?”

한라산국립공원 직원인 오희삼씨(항공대 OB)는 큼지막한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가슴에 매단 채 동릉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다음날이 동릉 안내소 근무인 오씨는 열흘 이상 나쁜 날씨가 지속되다가 저녁 무렵 모처럼 하늘이 터지자 이튿날 멋진 일출을 기대하며 동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희삼씨와 헤어진 다음 서두른다고 했지만 사진 몇 컷 찍고 나니 어둠이 밀려오고, 어둠과 함께 밀려오는 강추위와 눈보라를 피해 다시 대피소로 쫓기듯 들어선다. 


 

▲ 두텁게 쌓인 눈이 설국을 연상케 하는 구 용진각대피소 가는 길. / 눈을 녹여 식수를 만드는 정태문씨. / 한라산지기 오희삼씨.

 

 

 

동릉 정상에 올라서자 멋진 풍광 대신 눈보라가 몰아쳐

칠흑 같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이튿날 멋진 설경을 기대케 했지만 새벽 4시를 넘어서자 산 아래서 몰려온 안개가 산정을 뒤덮고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어차피 눈보라 속이라면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 새벽밥 먹고 미적거리다 아침 6시40분경 대피소 문을 나선다.

겨울철 켜켜이 쌓인 눈으로 멋진 설경을 보여주던 동릉 등로는 거센 바람과 눈보라에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상상산행이다.

“우와~,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네요.”

5년 전 비슷한 시기에 동릉을 오를 때 숲을 이룬 구상나무들은 저마다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두터이 눈을 인 채 이국적인 설경을 뽐내고, 부악 화구벽은 웅장한 풍광을 과시했다. 설경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지 밑으로 들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멋진 포즈를 취한 채 기념촬영했고, 동릉을 배경으로 촬영하고자 하는 이들은 제법 당당한 자세를 잡으며 카메라 앞에서 서곤 했다. 오늘은 눈보라가 5년 전 그 날의 풍광을 대신하며 모질게 불어댔다.

해발 1,600m 표석을 지나면서 나무가 서서히 사라지고 개활지가 펼쳐진다. 동릉 일대의 웅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곳이다. 위로 오를수록 바람에 날린 눈은 한쪽으로 쌓이면서 등산로 데크가 모습을 보이지만 이제는 얼음이 덮여 미끄럽고 데크를 조금만 벗어나면 두터운 눈에 푹 빠지는 바람에 애를 먹는다.

“야, 이게 뭐야. 33년 전이나 어쩜 이렇게 똑 같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잖아.”

동릉 정상에 올라서자 눈보라는 더욱 거세지고, 능선 너머 백록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못 들 만큼 모진 눈보라에 절절매다가 오희삼씨가 밤새 데워놓은 안내소 안으로 들어서자 아방궁에 들어선 기분. 그런데도 양효용씨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쉰다.
학창시절인 1978년, 이번 취재에 동행한 석상명·양효용씨와 함께 용산발 호남선 열차와 목포 발 여객선 타고 한라산행에 나섰던 기자는 당시 제주를 뒤흔든 태풍 속에 한라산행에 들어섰다가 구 용진각대피소에서 이틀 동안 꼼짝 못 하고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다 식량이 떨어지자 폭우 속에 산행을 강행해 동릉을 거쳐 백록담에 내려섰건만 짙은 안개 속에 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도 비에 푹 젖은 옷차림으로 오돌오돌 떨며 찍은 사진은 각자의 앨범을 장식하고 있다. 이후 한라산을 여러 번 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셋이 함께 오른 것은 33년 만이었다. 한데 구름안개는 시야를 차단시키고 눈보라는 얼굴을 들지 못하게 불어대니 서운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얼마나 좋아. 이렇게 셋이 또 한라산을 올랐으니 말이야.”

난롯가에 앉아 두런두런 옛 얘기를 나누며 혹시 하는 기대 속에 통제소에서 한 시간 가까이 머무르다가 “올 겨울 백록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차례밖에 없었다. 이 정도 바람으로는 날씨가 바뀌지 않는다”는 오희삼씨의 말에 마음을 접고 삼각봉대피소로 향했다. 관음사 코스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북면의 왕관릉~탐라계곡~개미등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동면의 성판악 코스에 비해 눈이 한층 많았다. 짙은 안개 속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것은 기본이고, 자칫 균형을 잃으면 눈 속에 처박히기도 하지만 모두 즐겁기만 하다.

“아니,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오전 9시30분경, 눈보라 속에서 설인이 나타났다. 큼지막한 배낭에 겨울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30대 초반의 산꾼이 홀로 올라왔다. 새벽 5시30분 관음사 입구를 출발했다니 4시간 만에 예까지 올라온 셈. 눈길이 나 있어도 쉽지 않을 텐데 삼각봉대피소 이후 러셀을 하면서 예까지 올라왔다니 대단한 준족이자 정말 산을 좋아하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길이 뻥 뚫려 있을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얘기를 듣고 그와 헤어졌으나 한 사람 족적으로 뚫릴 적설량이 아니었다. 동릉을 향해 올라간 산꾼의 발자국은 한발 뗌과 동시에 눈보라에 묻혀 버려 또다시 새롭게 길을 내며 내려서야 했다.

화구벽과 장구목 능선, 그리고 제주시가지 조망이 일품인 왕관릉 조망대를 지나 급경사를 내려서자 용진각대피소 터. 용진각대피소는 1974년 세워진 이후 등산인들이 한라산을 오르다 기상이변을 만났을 때 유용한 대피 공간이자 히말라야 원정을 앞둔 산악인들이 베이스캠프 삼아 이용하던 오두막집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2007년 여름 태풍 나리 때 백록담 북벽에서 무너져 내린 돌덩이와 뒤섞인 급류가 뒤덮이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생긴 게 삼각봉대피소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참 겁이 없었던 거야. 33년 전 대피소에서 이틀 동안 머물렀잖아. 그때 불어댄 게 나리 같은 태풍이었다면….”

용진각대피소 부근에 캠프를 설치한 훈련대들이 물을 뜨던 탐라계곡 상류에는 대형 현수교가 설치돼 있다. 이 역시 대피소가 사라진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다리를 건너서자 짤막한 오르막. 눈이 허벅지까지 차올라 제법 진을 짜내게 한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눈사태였다. 현수교를 건너선 이후 삼각봉대피소 직전 능선에 이르기까지 능선 사면은 눈사태 다발지역이다. 막판에 낙석방지용 철책을 2중으로 설치해 놓았지만 철책 위쪽이 급경사 벼랑을 이루고 있어 폭우 직후에는 수시로 살펴보게 되는 구간이다.

철책구간을 지나자 개미등 능선 위로 올라서고 곧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한다. 널찍한 대피소는 텅 비어 있었으나 라면을 끓이는 사이 밑에서 올라온 등산객들로 곧 어수선해진다.

“이제 다 끝난 거나 다름없어요. 두어 시간이면 관음사 코스 주차장까지 내려설 수 있으니까요.”

 


 

▲ 1 동릉 정상에서 구름안개가 연출하는 신비경을 바라본다. 1월 11일 촬영 2 동화 속 오두막집 같은 분위기의 진달래밭대피소. 3 눈을 뒤집어써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구상나무 숲길을 걷는 등산인들. 4 눈보라 몰아치는 동릉 정상 통제소. 5 사라오름 분화구 길을 걷는 취재팀. 6 동릉 정상에서 왕관봉으로 내려서는 등산인들. 멀리 제주시 일원이 바라보인다. 1월 11일 촬영

 

 

 

짙은 먹구름은 취재팀 토해내곤 대왕오름 집어삼켜

삼각봉대피소를 지나면서 숲은 수시로 변신한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눈을 살짝 묻힌 채 겨울을 춥게 나고, 상록수 나뭇가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몽땅 주워 담으려는 듯 눈을 듬뿍 묻힌 채 따뜻하게 겨울을 나고 있었다. 삼나무가 멋스럽다면 소나무는 고고하고 도도했다. 숲을 이룬 적송들은 많은 눈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 없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쭉쭉 자라고 있었다.

“너희들 어디서 왔니? 무거운 짐 메고 많이 왔는데.”

“저희끼리면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

대피소에서 30분쯤 내려섰을까, 앳된 청소년들이 눈밭에 서서 간식을 먹고 있다. 동계 산행에 나선 서울 상문중학교 산악부원들이었다. 지도교사 4명과 함께 제주도를 찾은 14명의 산악부원들은 엊저녁 관음사 야영장에서 하룻밤 묵고 이날 아침부터 용진각대피소 터를 향해 오르는 중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희귀 동아리 취급을 받는 산악부가 중학교에 있다니 정말 신기하다 싶었다.

숲 우거진 능선 따라 이어지는 눈길은 우리를 오두막집으로 인도했다. 탐라계곡대피소였다. 탐라계곡이 물이 불었을 때 하산객들의 피난처로 만들어진 탐라계곡대피소는 콘크리트 건물이건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깥 날씨가 그만큼 춥고 을씨년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급경사 눈길 따라 탐라계곡 다리로 건너선 다음 산길은 한결 순해졌다. 이제 운동화 차림의 연인들도 눈에 띄고, 한라산 동계 산행에 나선 초등학생 행렬도 나타난다. 천연석빙고였다는 구린굴을 지나 관음사 주차장에 내려서자 하산객을 기다리는 관광버스가 여러 대 세워져 있고, 제주시 행 손님을 맞기 위해 대기 중인 택시도 눈에 띈다.

“?자 옵서예(‘반갑습니다’라는 뜻). 제주시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택시를 타기 직전 뒤돌아서는 순간 산은 사라졌다. 짙은 먹구름은 한라산을 집어삼키고, 대신 우리를 토해 놓았다.
▲ 1 삼각봉 사면에 쌓인 깊은 눈을 헤치며 삼각봉대피소로 향하는 오현등고회 회원들. 2 구 용진각대피소 아래 현수교. 3 안내판이 대신한 용진각대피소 터. 4 무인대피소로 운영된는 탐라계곡대피소. 5 폭설 속에 한라산을 오르다 쉬고 있는 서울 상문중학교 산악부원들.

 

 

 

산행 길잡이 Guide


성판악서 출발, 관음사로 하산…9시간짜리 당일산행 코스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는 현재 개방돼 있는 한라산 탐방로를 따라 오를 수 있는 최고지점인 부악(釜岳) 동릉(약 19,20m)에 올라설 수 있는 코스로, 출발기점(주차장 기준 해발 680m)이 100m쯤 높고 경사가 완만한 성판악 코스로 동릉 정상까지 오른 다음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 탐라계곡 최상류로 내려선 다음 개미등을 타고 관음사 주차장으로 하산한다.

다른 코스도 그렇듯이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는 겨울 적설기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특히 폭설 직후에는 접근도로가 통제될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이고, 진달래밭대피소에서 동릉 정상을 거쳐 삼각봉대피소로 이어지는 구간은 눈길이 사라져 하루이틀 통제되기 일쑤다. 게다가 날씨가 좋더라도 빙판이 지거나 강풍이 몰아쳐 등산인들을 곤욕스럽게 만들곤 한다. 따라서 눈길이 잘 나 있다 손치더라도 방풍보온의류를 철저히 갖추고 아이젠을 반드시 휴대하도록 한다.

매표소~동릉 정상 간 3분의 2 지점인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숲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도중에 속밭대피소(성판악에서 4.1km)를 쉼터로 이용하고, 대피소에서 진달래밭대피소 방향으로 1.2km 떨어진 사라악약수에서 식수를 구한다. 사라악약수에서 0.5km 더 오르면 사라오름 입구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사라오름 전망대까지는 0.6km로 왕복 30분쯤 걸린다. 기생화산이 많은 제주 일원에서도 드문 화구호이며, 풍광과 조망이 멋진 곳이니 꼭 들르도록 한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면서 나무가 점점 작아지다 진달래밭이 펼쳐지면서 산길 오른쪽에 아담한 산장이 보인다. 조난자 구조를 위해 공원 직원들이 매점을 운영하며 상주하는 진달래밭대피소다(성판악 기준 7.1km). 긴급상황이 아니면 숙박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진달래밭을 지나면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조금씩 경관이 트이고, 날씨가 좋으면 한라산 동쪽에 산재한 오름의 무리를 감상하면서 오를 수 있다. 진달래밭 이후 동릉 정상까지는 데크가 깔려 있으나 한겨울에는 데크 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인다. ‘해발 1,800m’ 표석을 지나 급경사 오르막을 올라서면 동릉 정상이다. 백록담 분화구 안이 잘 내려다보이고 분화구 건너편의 정상이 바라보이는 지점이지만 변화무쌍한 한라산 날씨 상 기회가 많지는 않다.

관음사 코스는 한라산 북면의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백록담 북릉을 타고 왕관릉을 지나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르면 구 용진각대피소 터가 나타나고, 이어 탐라계곡을 가로지른 현수교가 나타난다. 다리 밑 계곡이나 다리 건너편 지계곡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계류를 건너면 거대한 삼각봉(1,695m) 급경사 절벽 밑으로 올라선다. 이곳부터 용진굴과 개미목 부근까지가 관음사 코스에서 경관이 가장 뛰어난 구간이다. 과거 여러 차례 눈사태 매몰사고가 일어났던 곳으로, 낙석방지 그물망이 설치돼 있다.

개미등 능선에 올라서면 곧 삼각봉대피소가 반겨준다. 이 대피소 역시 비상시에만 숙박이 가능하다. 대피소 이후로는 계속 완경사 내리막이다. 개미등이 끝맺는 탐라계곡대피소(삼각봉대피소에서 약 3.1km) 이후 탐라계곡을 건너 산죽밭 사잇길을 따르면 관음사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두 코스를 연계해 백록담을 오르는 산행은 한라산에서 가장 긴 코스다. 공원 내에 취사와 야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도시락과 행동식, 식수 등을 충분히 준비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산행시간은 눈길이 나 있을 경우 9시간 정도 잡으면 여유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은 탐방객의 안전을 위해 기점별로 입산시각과 하산시각을 정해 놓았다. 동절기(11~2월) 입산은 각 기점에서 오전 6시 이후에 산행이 가능하고 진달래밭대피소는 12시, 동릉 정상은 오후 1시30분 이전에 통과해야 한다. 삼각봉대피소의 경우 동릉으로 향할 때 12시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 따라서 성판악을 출발해 관음사로 넘어가려면 오후 1시30분 안에 동릉에 올라서야 한다. 문의(지역번호 064) 성판악지소 725-9950, 관음사지소 756-9950.   
  

교통

제주시까지는 항공이나 선박을 이용해 접근한다. 저가항공의 경우 8만 원 안팎의 저렴한 비용으로 김포-제주 왕복권을 구입할 수 있다.

항공사 문의전화 및 홈페이지 △대한항공 1588-2001 kr.koreanair.com △아시아나 1588-8000 www.flyasiana.com △제주항공 1599-1500 www.jejuair.net △티웨이항공 1688-8686 www.twayair.com △진에어 1600-6200 www.jinair.com. △이스타항공 1544-0080 www.eastarjet.com.

여객선 문의전화 및 홈페이지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제주항행) 1599-5985 dom.icferry.or.kr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제주항행) 051-400-3399 www.busanpa.com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제주항행) 061-240-6060 △완도항여객터미널(제주항행) 061-554-8000 △장흥 노력항(성산포항행) 061-867-6500 △제주항 여객선터미널 064-720-8520 △성산포항 여객선터미널 064-782-1025.

제주시→성판악
공항에서 승용차로 15분 거리인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10~15분 간격(06:00~21:30) 운행하는 5·16도로(제1횡단로) 경유 서귀포행 직행버스 이용. 요금 1,600원. 전화 1688-5300.

하산지점인 관음사주차장에서 노선버스를 타려면 2km 떨어진 제주대학교 근처까지 걸어가야 한다. 주차장 건너편 도로변에 택시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시내 1만5,000원, 공항 2만 원. 제주콜택시 064-757-0800.



숙식 (지역번호  064)

한라산국립공원은 관음사 야영장에 한해 야영이 허용된다. 취사장과 화장실이 갖춰 있으며, 야영 데크(50개소)도 있다. 야영장 이용료(텐트 1동당) 소형 3,000원 중형 4,500원 대형 6,000원. 주차료(승용차) 1,800원. 문의 관음사지소 756-9950.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기슭에 위치한 절물자연휴양림(721-7421)은 삼나무숲과 제주시 지정 제1호 약수터로 이름난 곳으로 산림휴양문화관과 숲속의 집 등 다양한 규모의 숙소가 조성돼 있다. 이용 전달 1일 오전 9시부터 홈페이지(jeolmul.jejusi.go.kr)를 통해 예약받는다.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 경차 1,000원, 중소형 2,000원, 대형 3,000원. 시설물이용료(비수기·주중/성수기·주말) 숲속의 집 4인실(5동) 3만 원/5만 원, 6인실(5동) 4만 원/7만 원, 8인실(4동) 6만 원/9만8,000원, 11인실(2실) 7만 원/11만 원. 산림휴양문화관 6인실(5실) 4만 원/7만 원, 8인실(5실) 6만 원/9만8,000원. 숲속수련장(20인용) 12만 원/18만 원. 숙소 이용자는 입장료와 주차료가 면제된다. 입실시간은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며 퇴실시간은 12시. 여느 휴양림과 달리 휴일이 없이 운영된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포함해 제주도 일원에는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114제주민박(www.114jeju.com), 우리여행(www.woori-tour.com) 등 숙박관련 사이트 참조.



맛집 (지역번호  064)


▲ 제주 흑돼지고기
제주시 일원에는 다양한 메뉴를 취급하는 식당이 많이 있다. 화로향돼지고기(724-4050)는 제주 흑돼지요리로 이름난 집이다. 흑돼지 오겹살 1인분 1만3,000원. 흰돼지 오겹살 1만1,000원, 목살 1만 원, 항정살 1만2,000원, 가브리살1만2,000원. 도라지식당(721-3142)은 제주 앞바다에서 잡아낸 은갈치를 호박과 배추와 함께 끓여낸 갈치국(9,000원)이 일품이다. 갈치조림 2인분 3만2,000원, 갈치구이 1인분(1점) 1만2,000원. 해물뚝배기 1만2,000원. 성게미역국 8,000원. 제복일식(724-2949)은 비교적 적당한 가격에 싱싱한 생선 맛을 볼 수 있는 생선요리집이다. 초밥 1만 원, 활어초밥 1만5,000원, 돔(몸통)지리 1만3,000원, 돔(머리)지리 1만5,000원, 회덮밥·매운탕·알탕 각 1만3,000원.

 

 

 

 

 

       영실~윗세오름~남벽~돈내코 코스 12.8km

 

 

백록담을 호위하는 성채 같은 화구벽 아래로

따뜻한 남쪽나라 제주 서귀포에도 폭설이 내렸다. 여간해선 영하로 떨어지지 않던 수은주도 마이너스. 그야말로 겨울다운 추위였다. 한라산의 적설량은 무려 2m. 산간으로 이어지는 1100도로는 적막강산. 지나는 차량이라곤 비상등을 켠 제설차뿐. 신묘년 벽두부터 한라산에 쏟아진 폭설로 제주는 하얀 눈나라 동화 속 산촌으로 변했다.

서귀포에서 우정횟집을 운영하는 거산회 강상철씨의 사륜구동 갤로퍼로 겨우 영실에 닿았다. 가장자리마다 제설차가 밀어낸 눈 때문에 도로가 봅슬레이 코스 같다. 십수 년 전 한라산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눈꽃축제 때 이곳이 스키 슬로프였다지. 그랬다. 한라산은 도로건 산이건 눈 천지였다.

어렵사리 도착한 영실매표소에는 걸어서라도 설국을 밟아보려고 올라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눈에 덮여 시름하는 자연 속에 잠긴 사람들의 얼굴엔 비탈진 도로를 걸어 올라온 힘겨움은 온데간데없이 눈사람 웃음처럼 신이 나서 방싯거린다. 어른이나 아이나 눈 속에선 모두 동심으로 회귀하는가보다. 폭설 후 설산에 내리는 싱싱한 햇살 같은 미소들이다.

해발 1,280m 고지 영실 들머리의 소나무 숲에도 투명한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수백의 기암이 절벽을 이루고 골짜기 사이로 샘 솟아나 메마른 땅을 적시는 영실의 소나무들은 겨울에도 말쑥한 몸체를 허공으로 쑥쑥 뻗어 올린다. 금강송보다 형질이 우수하다는 한라산의 적송은 겨울 하얀 눈밭에서 그 광채를 더 찬연하게 뽐낸다. 폭설 때문에 통제되었던 입산통제가 풀리고 한라산 윗세오름으로 출근하는 국립공원 청원경찰 이용길(40)씨, 한라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산행대장인 김정조(48)씨와 함께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벗삼아 영실을 오른다.


▲ 깊은 눈에 덮인 윗세오름 일원. 거무튀튀한 백록담 화구벽이 흰눈을 뚫고 솟구쳐 올라 있다.

 

 

빙벽 속에 흐르는 오백장군의 슬픈 전설

영실(靈室)은 말 그대로 신령이나 신선이 사는 골짜기를 뜻한다. 봄의 꽃바다와 한여름의 신록, 가을날의 단풍, 겨울의 얼어붙은 폭포 등 사계절 언제 찾아가도 산의 신령스러움이 묻어나는 곳이 바로 영실 코스다. 한라산을 자주 오르는 이들에게, 한라산 등산로 중 어느 코스가 가장 아름다운가, 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영실 코스에 표를 던진다. 제주 최고의 경승을 일컫는 영주십경에서도 영실기암(靈室奇巖)이 들어 있다. 조선시대 한라산을 올랐던 선비들이 택했던 곳도 바로 영실 코스다.

영실 코스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영실기암이다. 1280고지에 있는 등산로 들머리에서 적송 숲을 지나 20분 정도 걸어가노라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웅장한 기암괴석이 병풍을 두른 듯이 펼쳐진다. 한여름 소나기가 쏟아진 후 절벽에는 물기둥이 쏟아지며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겨울, 수직의 벼랑은 얼음폭포로 변한다. 절벽에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녹아내리고 밤이 되면 차가운 기온 때문에 고드름으로 언다. 햇살 때문에 단단히 여물지 못해서 빙벽깨나 탄다는 산꾼에게도 이곳 영실폭의 빙벽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아름다운 비경에 늘 슬픈 전설이 스미는지, 슬픈 이야기가 아름다운 풍경을 낳았는지 이곳 영실기암에도 설화 속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500명의 아들을 키우던 어미가, 사냥 나간 자식들 먹일 죽을 쑤다가 그만 솥에 빠지고 말았다. 사냥에서 막 돌아온 아들들은 지치고 배고픈 터라, 고소한 냄새 풍기는 죽을 맛있게 먹었다. 어미의 부재를 걱정하던 막내아들만이 어미를 찾아 산을 헤매었다. 죽 솥을 거의 비우고 바닥이 드러나자 어미의 뼈가 보였다. 그때서야 아들들은 제 어미를 삶은 죽을 먹었음을 알게 되었다.

슬픔에 겨운 아들들은 백날을 울다가 지쳐 선 채로 바위로 굳어졌다. 막내아들은 형들을 원망하며 제주섬을 떠돌다가 제주의 서쪽 끝 바다에 가서 바위로 굳었고 제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지금도 영실기암 절벽에는 비가 올 때마다 오백 아들의 슬픈 눈물인 양 폭포가 생겨나고 대부분 마른 하천인 한라산에서 유독 영실만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오백장군 비경을 바라보며 능선을 올라서자 제주 서녘 들판에 자리 잡은 오름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돌아앉은 부처같이 인자한 모습의 볼래오름과 이슬렁오름, 세오름, 노꼬메오름들이 비온 뒤 솟아난 죽순처럼 연이어 있고 둥그스름한 수평선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한 달에 서너 번 영실 코스를 오르는 강상철씨와 한라산이 일터인 국립공원 청원경찰 이용길씨도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풍광에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 웅장하면서도 괴이한 풍광의 오백장군을 바라보며 윗세오름으로 향한다.

 

 

전설 속의 어미가 환생한 어미바위

하얀 눈밭 위로 검은 까마귀 몇 마리가 영실 계곡을 선회비행하며 깍깍거린다. 신령의 방에 온 나그네들에게 ‘까불지’ 말라고 시위하는 투다. 가파른 경사를 오를수록 납작 엎드렸던 오름들도 덩달아 하늘로 날아오르듯 높아진다. 병풍바위 정수리 능선을 지나는데 벼랑에 위태하게 도드라진 바위기둥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검은 바위 위로 하얀 눈이 정갈하게 내려앉은 자태가 우아하기 그지없다.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네 같기도 한 게 혹 전설 속의 어미가 바위로 환생한 듯싶다. 울다 지쳐 바위로 굳어버린 오백의 아들을 내려다보는 자태엔 고고함이 깃들어 있다. 혹자는 저 바위를 어미바위라 부르기도 한단다. 진달래꽃 피어나는 봄날엔 머리에 꽃비녀까지 꽂는다니 올 봄 한라산 봄 마중 길엔 눈여겨볼 일이겠다.

병풍바위를 지나 비밀의 숲과도 같은 구상나무 군락지로 들어서면서 구상나무 특유의 풋풋한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구상나무는 온몸으로 차가운 겨울을 맞는다. 뒤를 돌아보면 제주 서쪽에 올망졸망 솟아오른 오름들이 실루엣을 그리며 봉긋하게 솟아 있다. 맑은 날에는 비양도 너머 바다로 잠기는 노을 또한 환상적 풍경을 그려낸다는 곳이다. 수평선 멀리 대한민국 최남단 섬 마라도가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떠 있는 풍경 또한 일품이라는 김정조씨의 입담이 구성지다.

뒤로 펼쳐지는 비경을 아쉬움 속에 남겨두고 구상나무 숲을 지나 선작지왓에 이른다. 숲 사이로 언뜻 백록담의 화구벽이 머리를 내밀었다 숨었다 해서 발걸음도 빨라진다.

한라산은 제주라는 섬 한가운데 우뚝 솟아 신비롭다. 더욱 불가사의한 한라산의 정체는 바로 선작지왓이라 불리는 고산의 평원 때문이다. 해안선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산등성이가 해발 1,700고지에 이르러 펼쳐내는 가없는 벌판, 봄이면 털진달래 산철쭉 꽃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상의 화원이 느닷없이 펼쳐진다. 꽃 피는 봄날 선작지왓은 상춘객들의 함성과 꽃들의 향연으로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부드럽게 솟아오른 윗세오름의 세 능선과 불끈 솟아오른 화구벽을 배경으로 펼쳐진 꽃의 바다는 한라산이 품은 신의 정원, 바로 그것이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 등산객들이 뜸해질 무렵에는 수십 마리의 노루들이 이 초원을 뛰어다니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도 하다. 겨울이면 또 어떤가. 바람과 눈발과 햇살이 빚어내는 광활한 설국. 아, 하는 단말마의 감탄이 불현듯 다가서는 꿈결 같은 광야, 바로 선작지왓이다.

어리목코스와 이어지는 윗세오름대피소는 선작지왓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산장이다. 오래된 산꾼들에겐 추억이 깃든 곳이자 한라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겐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사발면을 먹을 수 있는 행복한 산장이 바로 윗세오름산장이다.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을 뜻한다. 한라산 주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일직선상에 세 오름이 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1100도로변에 있는 세 오름이고, 그 세 오름보다 고도상으로 위쪽에 있어서 윗세오름이라 부른다.

▲ (위부터)영실 코스 들머리를 장식한 적송 숲./ 폭설 직후 허리까지 빠져드는 영실 코스. / 눈덮인 평궤대피소. 무인산장이다.

 

 

한라산 정상을 잇는 서북벽 코스와 남벽 코스가 통제되기 전까지 이곳 윗세오름은 한라산 정상으로 가기 위한 휴게소이자 마지막 전의를 불사르던 산꾼들의 안식처였다. 그러다가 서북벽 코스와 남벽 코스가 차례로 통제되면서 윗세오름은 어리목 코스와 영실 코스의 종점이자 분기점 역할을 했다. 이후 2009년 돈내코 코스가 개방되면서 이곳 윗세오름까지 등산이 허용된다.

취재팀은 윗세오름에서 다시 원기를 회복한 후 남벽순환로를 따라 돈내코로 향한다. 눈에 덮인 구상나무가 햇살을 받아 기묘한 형상으로 서 있는 모습이 흡사 고성을 지키는 동장군 같다. 길은 뒷동산 산책길처럼 아늑하고 눈에 덮여 있어 포근하기까지 하다.

백록담을 호위하는 성채처럼 솟아 있는 화구벽을 바라보며 남벽순환로를 걸어가다 등산로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백록샘으로 잠시 접어든다. 이곳에는 히말라야 8,000m 10개봉과 남극점과 북극점을 밟았던 제주 출신 산악인 오희준의 케른이 있다. 한라산 자락에서 태어나 한라산의 겨울 눈밭에서 산을 배우고 마침내 세계의 고봉준령을 넘나들었던 산사나이 오희준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의 고향 서귀포가 백록샘에서 내려다뵌다. 날고등어 등처럼 푸르고 힘찼던 젊은 영혼을 히말라야 설산에 바쳤던 산사나이 희준을 아끼는 선후배들이 한 점 두 점 쌓은 돌탑이 화구벽을 바라보며 옹골차게 솟아 있다. 연중 푸른 물을 내뿜던 백록샘은 폭설 속에 잠겨서 봄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다.

길은 방아오름을 지나 남벽에서 정상을 목전에 두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정상까지는 500여 m.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다. 돈내코 등산로는 과거 제주 지역의 산악인들이 남북 종단코스로 각광받던 길이다. 그러나 윗세오름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남벽 코스가 자연휴식년제로 지정되면서 함께 등산이 통제되었다.

2009년 말부터 돈내코 들머리에서 남벽 입구인 분기점까지 이어지는 돈내코 코스와 함께 윗세오름에서 남벽 입구까지 남벽순환로가 함께 개방되었다. 비록 백록담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남벽순환로는 한라산 정상을 이루는 웅장한 화구벽을 따라 한라산 고산지대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환상의 코스다. 특히 봄이면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이곳의 풍경은 전문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한라산 정상 바로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솟아오른 방아오름 일대의 벌판은 한라산 주봉을 중심으로 가장 아래쪽에 펼쳐져 있어서 윗세오름이나 선작지왓보다 봄이 빨리 찾아온다. 골짜기에 잔설이 남아 있는 계절에도 황량하던 벌판이 어느 새 분홍빛 꽃바다로 뒤덮이며 두 계절이 공존하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

자연 암벽이 굴을 이룬 평궤대피소를 지나면서 등산로는 제법 급경사를 이룬다. 붉은 수피를 자랑하는 우람한 적송이 자라는 숲을 지난다. 한라산에서는 해발 1,200m 고지에서 1,400m 고지 일대를 빙 둘러가며 적송이 자란다. 지금처럼 고도계와 나침반, 심지어 GPS가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나무만 봐도 이곳이 몇 고지인지 가늠했다. 자라는 나무만으로.


▲ 백록담 화구벽을 뒤로한 채 선작지왓에서 평궤대피소로 내려서는 취재팀.

 

 

섶섬·문섬·범섬 바라보며 바다로 뛰어드는 기분

살채기도를 지나면서 겨울에도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굴거리나무를 만난다. ‘살채기’는 ‘대나무로 만든 문’, ‘도’는 ‘입구’를 뜻하는 제주방언이다. 한라산에서 방목이 이루어지던 시절 마소의 출입을 막는 살채기가 있는 입구를 살채기도라고 했다.

굴거리나무와 겨울 꽃의 대명사 동백나무와 꽝꽝나무, 우묵사스레피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돈내코 코스의 난대림 숲은 어느 계절에 들어도 초록의 상큼한 기운이 감돈다. 연중 푸른 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 때문에 돈내코 코스는 무더운 한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점차 고도를 낮추어가던 숲이 장막을 걷어내더니 느닷없이 바다가 펼쳐진다. 쪽빛 바다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며 서귀포 칠십리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섶섬과 문섬, 범섬을 비춘다. 언제 폭설이 내렸나 싶게 햇살에 녹아 질퍽거리는 눈길을 따라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 상쾌하다.

여행 팁 Guide 제주도민들의 휴양지 ‘돈내코국민관광단지’

돈내코 코스 들머리에 있는 돈내코국민관광단지는 연중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제주의 하천이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인데 비해 돈내코계곡은 여름철에도 1분 이상 몸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물로 유명하다. 여름 피서철에는 제주도민은 물론 관광객들까지 이곳을 찾아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히는 곳이다. 원앙폭포라 불리는 곳에서는 백중날을 맞아 물맞이하는 풍경도 볼 수 있다.

돈내코관광단지에는 취사 가능한 야영장이 있다. 또한 인근에는 과거 조선시대 관아로 이용했던 영천관아지터와 영천악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돈내코 코스 들머리 인근에 있는 서귀포청소년야영수련장에서도 인근의 미악산 정상까지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서귀포지역 청소년들의 극기훈련장으로 이용하는 코스인데 최근에는 서귀포시민들의 건강산책로로도 인기가 높다.

미악산은 서귀포시 일대에서 고근산과 함께 서귀포 일대의 조망권이 좋은 곳이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은 물론 서귀포 칠십리 앞바다의 숲섬, 문섬, 범섬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돈내코 일대는 울창한 난대수림으로 유명한데, 특히 천연기념물 432호로 지정된 한란자생지에는 3,000촉 이상의 한란이 자생하고 있다. 이 지역은 자생란의 보호를 위해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등산로 들머리에는 사시사철 맑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흐르는 돈내코 유원지가 있어 한여름에는 서귀포의 강정천과 더불어 제주 도민들의 피서지로 각광받는다.

▲ 선작지왓에서 겨울 햇살을 즐긴다.

 

 

산행 길잡이 Guide 겨울철엔 빠듯한 당일 코스

영실 코스는 영실휴게소가 있는 등산로 들머리 자체가 1,280m 고지에 있어 윗세오름까지는 3.7km로 약 1시간20분이면 닿을 수 있다(영실기암 1.5km·약 1시간). 윗세오름에서 2009년 개방된 돈내코 코스의 종점인 남벽 분기점까지는 2.1km로 1시간 걸린다.

영실 매표소에서 들머리인 영실휴게소까지 도로는 12인승 이하의 차량만 통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할 경우 2.5km의 도로를 걸어서 가야 한다. 매표소부터 걸어갈 경우 윗세오름까지 2시간30분의 여정이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 3분이면 갈 수 있고 비용은 3,000원 정도 한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휴게소에서는 간단한 등산장비와 제주특산품은 물론 산채비빔밥 등 식사도 가능하다. 영실휴게소는 한라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휴게소인데, 등산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곳까지 오는 관광객으로 늘 북적인다. 고도가 높은 곳인 데다 휴게소 앞에서도 영실기암이 올려다 보이기 때문에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등산로에는 노루샘 등의 식수가 있고, 윗세오름 매점에서 간식 외에 사발면 등도 구입이 가능하다.

돈내코 코스는 한라산 등산로 중 유일하게 서귀포 지역에서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는 코스다. 이 코스는 돈내코 유원지 북쪽의 서귀포시 추모공원에서 출발해 남벽분기점까지는 7km, 이곳에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 2.1km로 총 연장 9.1km가 된다. 눈길이 잘 나 있을 경우, 남벽 분기점까지 약 4시간, 윗세오름을 거쳐 영실이나 어리목까지 7시간 정도 예상해야 한다. 따라서 겨울철엔 서둘러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 백록샘 부근의 오희준 케른.

 

 

교통

제주시→영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시간2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시외버스를 타면 된다. 영실매표소까지는 50분 걸린다. 운행노선은 터미널-노형로터리-한라수목원 입구-신비의도로-어리목 입구-영실매표소-중문정류장 순이다. 서귀포시에서는 중문 하나로마트 맞은편 정류장에서 이 버스를 타면 된다.

서귀포→돈내코 입구 시내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중앙로터리 정류소에서 3번 법호촌행 시내버스 이용. 08:02, 09:00, 10:05, 11:15, 12:25, 13:20, 14:55, 16:00, 17:00, 18:00, 19:00, 20:05, 21:25 출발. 요금 950원. 서귀포시 대중교통 문의 서귀포시 건설교통과 760-3114.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5·16도로(1131번 지방도로)를 이용할 경우 서귀포산업과학고 앞에서 내린 후 10분 정도 걸으면 돈내코유원지다.

숙식 (지역번호  064)

제주시와 서귀포시 일원에는 민박에서 특급호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숙박업소가 많이 있다. 돈내코 등산로 들머리에 있는 돈내코 야영장에는 조망과 숲이 좋은 산사면에 20여 개의 데크와 취사장, 급수대, 샤워장이 갖춰 있다. 이용료 무료.

영실 코스 기점 가까이 부근에 서귀포자연휴양림이 있다. 휴양림에서 영실까지 승용차 기준 15분. 이용요금(주말/주중) 8인실 9만8,000원/6만 원, 6인실 8만5,000원/5만 원, 5인실  7만 원/4만 원, 4인실 5만5,000원/3만2,000원, 입장료 어른 1,000원(도민 무료), 주차료 2,000원. 객실 이용 시 입장료와 주차료 무료. 휴양림 홈페지(huyang.seogwipo.go.kr)를 통해 예약을 받는다. 문의전화 738-4544.

돈내코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법호촌과 토평에는 관광객들에게도 알려진 맛집이 있다. 바로 연탄숯불구이로 유명한 토평마을의 영천사랑가든(732-9550), 상록식당(762-4974) 동성식당(733-6874), 토평골(732-9295) 등이다.
 
 

 

 

 

제주의 원시성 간직한 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은 제주의 속살을 엿보는 숲길이다. 아득한 옛날 제주의 들녘을 호령하던 테우리들(말몰이꾼)과 사농바치(사냥꾼)들이 거닐었고, 화전민과 숯을 굽던 이들 그리고 표고버섯 따던 이들이 걸었던 사려니숲길은 원시 그대로의 제주 모습을 만끽할 수 있는 숲 트레일이기 때문이다.

해발 500~600m대에 우거진 숲을 가로지르는 사려니숲길은 한라산 북동쪽 비자림로(1112번 지방도)에서 시작해 물찻오름 들머리를 거쳐 성판악휴게소(숲길 길이 13.5km) 혹은 붉은오름 입구(10km) 또는 사려니오름 입구(15km)로 이어진다. 그 사이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포함해 서어나무, 졸참나무, 산딸나무 등 여러 수종이 어우러진 자연림을 가로지른다. 숲에는 식물만 있는 게 아니다. 오소리와 제주족제비, 팔색조와 참매, 쇠살모사 등 다양한 동물도 서식한다. 게다가 물찻오름, 붉은오름, 사려니오름 등 제주 특유의 기생화산이 숲 곳곳에 불룩 솟아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숲속에서 겨울잠 자는 천미천 풍광 일품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사려니숲길은 흰눈에 덮여 푸르름 대신 하얀 청아함으로 빛났다. 페이로더가 널찍하게 밀어낸 눈길 따라 걷는 맛은 새로웠다. 산길 하면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하는 법. 사려니숲길은 그 통념을 깼다. 슬슬 내려가는 듯하다 슬슬 올라가고 그러다 평지 길로 이어지곤 했다. 아니 평지나 다름없었다.


▲ 원시의 숲 우거진 물찻오름이 신비감 넘치는 백설의 세계로 변신해 있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뒤섞여 천연미가 한층 더한 숲길은 고즈넉했다. 호젓했다. 그래서 모처럼 사색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여유를 도와주려는지 전화벨도 울리지 않는다.
한동안 완만하게 이어지던 내리막길은 새왓내를 가로질렀다. 새왓내는 천미천 지류다. 천미천(川尾川)은 해발 1,400m대의 어후오름을 비롯해 물장오름, 물찻오름, 부소오름, 개오름 등 40여 개의 오름을 끼고 표선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25.7km 길이로 이어지는, 제주에서 가장 긴 나뭇가지형(樹脂形) 하천이다. 여름철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천미천이건만 지금은 깊은 눈에 덮여 눈보라를 견뎌내며 겨울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참꽃나무숲을 지날 무렵 40대 중반의 여성 트레커들 세 명이 추월한다. 제주시민인 이들은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라며 “주말이면 사람에 치일 만큼 탐승객이 많다”고 귀띔해 준다. 사려니숲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물찻오름 탐승객들로 인기를 누려왔다. 봄가을뿐 아니라 여름철에도 숲그늘과 숲바람을 즐기는 이들이 즐겨 찾는 길이었다.

사려니숲길 입구 관리사에서 만난 숲해설사 말대로 2km 지점인 표고재배사 갈림목을 지나자 눈길은 외가닥 오솔길로 바뀐다. 차가운 눈길이건만 고향집 찾아가는 길처럼 아늑하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파아란 이파리 달린 덩굴이 칭칭 감아 오른 잡목숲을 가로지르고, 두터운 눈에 크리스마스 트리로 변한 삼나무가 빼곡한 숲길 따라 가는 사이 제주 여성들은 오솔길 끝으로 사라진다.

4km에 지나지 않는 트레킹이건만 눈보라 속의 눈길 걷기는 쉬이 힘을 빼내고, 쉼터가 눈에 띄자 눈보라를 피해 얼른 들어선다. 잠시 숨을 돌리자 설경에 빠져든다. 눈길 밖은 백설의 세계. 나무도 풀도 하나의 설화를 그려놓고 있다.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린 눈은 대지를 덮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비자림로 입구를 출발한 지 4.5km 지점을 지나자 물찻오름 들머리(비자림로 4.7km·사려니오름 입구 1.8km). 2008년 12월 이후 2010년 11월 말까지 2년간 자연휴식년제로 입산이 금지돼 왔으나 생태보전을 위해 올 한 해 더 연장할 계획이다. 들머리 부근에 쉼터와 화장실이 조성돼 있다.


▲ 1. 비자림로 변의 사려니숲길 입구. / 2. 물찻오름 표석. 물찻오름 가는 길은 올 연말까지 자연휴식년제에 묶여 통제된다. / 3. 설국으로 변해버린 물찻오름.
물찻오름(水城岳·717.2mm)은 제주시에 인접해 있고, 들머리 숲이 좋아 한여름에도 탐승객이 많이 찾는 오름이었다. 숲길에서 150m 높이의 분화구 외곽까지 이어지는 길도 온통 숲이다. 거목이 뿌리째 뽑혀 쓰러지고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등, 태풍을 비롯한 자연 현상에 의해 훼손된 곳이 간간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다.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 굼부리에 물이 차 있는 오름은 많지 않다. 부악의 백록담 외에 사라악, 물장울, 동수악, 물영아리, 금악, 그리고 이곳 물찻오름 정도다. ‘물찻’은 물이 찼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제주 말(語) ‘잣’은 성(城)이란 뜻이라고 오름 들머리의 안내판에 적혀 있다. 즉, 분화구 안쪽이 낭떠러지를 이루고 그 안에 물이 차 있어 ‘물찻’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물찻오름 가는 길은 눈이 깊었다. 들머리에 닿을 무렵 의기양양하게 내려서기에 분화구로 내려섰다 왔나보다 했던 제주 여인네들의 발자국은 도중에 끊겨 있었다. 며칠째 계속된 눈으로 모든 게 하얗다. 원시 깊숙이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깊은 눈 헤치느라 힘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분화구 위에 올라섰으나 짙은 안개에 기대했던 조망은 터지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 눈보라가 기세를 꺾고 안개가 흩어질 즈음 분화구로 내려섰다. 원시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싶었다. 나무들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봄여름가을에는 많은 전설 간직한 듯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화구호는 흰눈에 덮여 설원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찾은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겨울 나그네였다.

물찻오름 입구를 지나면 붉은오름까지 이어지는 사려니숲길 10km 구간 중 절반쯤 걸은 셈이다. 이후 첫 번째 삼거리(물찻오름 입구에서 04.km)는 성판악 갈림목. 여기서 곧장 뻗은 길을 따라 9km 걸어가면 5·16도로 변의 한라산 성판악 등산로 입구로 다가선다. 평소 탐승객이 많은 숲길이다.

▲ 눈 덮인 새왓내를 가로지르는 숲 나그네들.

붉은오름으로 가려고 왼쪽 길을 따르면 또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피톤치드가 많이 나와 정신과 육체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여 ‘치유의 숲’이라 이름 지어진 곳이다. 여기서 안내판에 ‘서어나무숲 1.1km’라 표시돼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가면 한남시험림을 거쳐 서성로 사려니오름 입구로 빠져나갈 수 있으나 통제 구간이다. 따라서 특별한 허가 없이 숲 탐승을 하려면 곧장 뻗은 숲길을 따라야 한다.

붉은오름 정상데크에서 제주 동쪽 풍광 조망

숲길은 이제 삼나무가 주류를 이룬다. 여러 수종 중에서도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는 나무다. 명상에 잠기고, 나그네들과 두런두런 거리며 걷노라면 붉은오름휴양림 입구 팻말 앞에 선다. 사려니숲길에서 북쪽으로 700m쯤 떨어진 숲속에 조성 중인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은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숙박시설 8동 14실과 야영장, 수상데크 등의 시설을 갖춘 상태에서 올 여름 피서철에 앞서 개장할 계획이다. 문의 서귀포시청 공원녹지과 064-760-3047~8.

붉은오름휴양림 입구에서 500m쯤 더 가면 붉은오름 입구에 닿는다. 붉은오름(529m)은 한라산 동면에서 가장 높은 기생화산인 사라오름(1,325m)에서 뻗은 능선이 성널오름(성판악·1,215.2m)~괴평이오름(784m)~물찻오름(검은오름·717.2m)을 거쳐 성산일출봉까지 뻗어내리는 사이 솟아오른 오름이다. 입구에 세워진 ‘붉은오름 정상 가는 길’ 팻말 방향을 따라 삼나무숲길을 따르면 남조로 동쪽 일원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오름 정상 조망데크에 올라선다. 오름길 도중에 붉은오름휴양림으로 빠지는 길도 있다.

붉은오름 입구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면 통제소에 이어 남조로 사려니숲길 입구에 닿는다. 약 3시간 소요.

사려니숲길 트레킹 팁 Guide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에서 서성로로 이어지는 15km 숲길을 일컬으나 도중에 성판악이나 붉은오름으로 빠지는 숲길도 나 있다. 그중 항시 개방된 숲길은 비자림로 입구~물찻오름 입구~붉은오름 입구 10km 숲길이다. 물찻오름은 2008년 12월 이후 올해 말까지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이 통제돼 있고, 물찻오름·붉은오름·사려니오름 갈림목에서 사려니오름 입구까지 10km 구간은 통제 중이다. 단, 서성로(1119번 지방도) 한남감귤가공공장 부근의 사려니숲길 들머리에서 삼나무 전시관을 거쳐 사려니오름을 왕복하는 6km 구간은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림산림연구소(064-730-7272, jejuforest.kfri.go.kr)에 탐방 이틀 전까지 인터넷을 통해 신청하면 탐승이 가능하다. 무료. 월·화요일은 휴무.


숲해설사와 동행을 원하면 제주시청 공원녹지과(064-728-3595)에 문의한다. 단, 20명 이상 단체 탐승객에 한하며, 겨울에는 식물이 눈에 덮여 해설이 어려우므로 3월 이후 눈이 녹아 내렸을 경우에 한해 동행 가능하다.

대중교통

제주시→비자림로 사려니숲길 입구 시외버스터미널(1688-5300)에서 매시 28분(06:28~20:28) 출발. 요금 1,000원. 출발시각·요금 문의 064-753-3242.

제주시→붉은오름 입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06:00~21:20 20분 간격 운행하는 남조로 경유 서귀포행 버스 이용. 요금 1,500원.

제주시→사려니오름 입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시 20분(06:20~19:20) 이후 20:00, 20:50 출발하는 서성로 경유 시내버스 이용, 한남감귤가공공장 하차. 요금 2,500원.

 

 

 

 

 

 

윗세오름이 들려주는 순백의 광시곡 속에서

 

“일 때문에 죽을 필요는 없잖아?”


한라산에 한라산은 없었다. 용서치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내리는 폭설이 나무, 바위, 길 사소한 것 하나도 남기지 않고 꼼꼼히 지우고 있었다. 겨우 지붕을 드러낸 윗세오름대피소-. 동행한 서귀포 산꾼들은 지금 돈내코로 갈 수 없다고 말렸다. 몇 분 후 우리는 돈내코 길목인 한라산 남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 혹독한 눈보라와 2m에 이르는 폭설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결국 돈내코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수정, 어리목으로 하산했다.

 

06시, 강상철(46), 이태봉(41)씨와 서귀포에서 만났다. 오늘 산행을 함께 할 든든한 아군이다. 서귀포 토박이자 거산회원들로 한라산 산행이라면 이골이 난 이들이다. 산악회 사무실에서 4륜구동 지프차로 갈아탔다.


영실 입구에서 도로가 끝나는 영실휴게소까지 5km는 스노체인을 감은 지프차만 통행을 허가하고 있다. 굽이굽이 이어진 빙판길을 지프차에 의지해 오른다. 중간 기점인 국립공원 영실사무소에서 직원들이 제지한다. 여기서부터는 지프차도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란다. 정 안 되면 조심해서 차를 돌려 내려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통과해 콘크리트가 희미하게 보이는 눈길을 뚫고 영실휴게소에 닿았다.


▲ 적설량이 많아 설피를 신고 간다. 발이 빠지지 않아 좋지만 오르막에서 곤욕스럽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 설국으로 입국한다. 길은 눈 아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길을 알려주는 건 붉은 깃발을 꽂은 대나무 막대다. 어떤 곳은 겨우 깃발만 밖에 나와 있다. 오를수록 절로 감탄이 난다. 검은 나무줄기에 흰 눈이 앉은 풍경은 장인의 손길이 깃든 섬세한 조각 전시장이다. 작품을 감상하기에 쾌적한 환경은 아니다. 싸늘한 공기와 푹푹 빠지는 발길은 익숙해지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 눈 덮인 숲은 보석으로 가득 찬 냉동실을 걷는 기분이다.


눈은  소리마저 지운 듯 고요하다. 점점 일행의 거친 숨소리와 “뽀드드득” 하는 러셀 소리가 커진다. 아름답던 설경도 눈에 익자 기쁨을 주진 못한다. 앞서 가는 이는 뒷사람이 딛기 좋게 적당한 보폭과 걸음으로 길을 낸다. 뒷사람은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눈을 다진다. 눈밭에 길이 나는 과정이다.


▲ 눈보라로 시야가 나빠 GPS와 안내판으로 위치를 가늠한다.

 

눈발이 날린다. 바람은 스노샤워처럼 땅을 훑기도 하고 매섭게 얼굴을 때리기도 한다. 혹독한 눈의 파라다이스, 걸을 맛이 난다. 겨울산은 겨울산다워야 한다. 눈 없는 겨울산은 걷기에 편할진 모르나 인수봉 없는 북한산 짝이다. 덕택에 경치는 제로에 가깝다. 영실기암이나 병풍바위 같은 영실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눈보라 어딘가에 묻혀 있다.


교대로 러셀한다. 아무리 조심스레 디뎌도 간혹 발이 크레바스처럼 푹 들어가 허리까지 잠기곤 한다. 무릎으로 눈을 다지며 천천히 빠져나와 다시 걷는다. 한 번씩 그렇게 빠질 때마다 호흡이 리듬을 벗어난다. 오를수록 나무가 줄어들더니 트인 오름길이다. 바람이 화난 듯 거친 소리를 내며 드러난 피부를 공략한다. 땀이 나서 덥다고 서서 벗기도 어렵고, 춥다고 옷을 더 꺼내 입기도 마땅찮다. 강한 눈보라 속에서 걸음을 멈춰 뭔가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멈추면 걷느라 몰랐던 추위가 잔인하게 덮쳐온다.


▲ 온통 하얗게 변한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진 등산로.

 

윗세오름은 크고 작은 봉우리 세 개가 연달아 이어져 있는데, 제일 위쪽에 있는 큰 오름이 붉은오름, 가운데가 누운오름, 아래쪽이 족은오름이다. 예로부터 윗세오름 또는 웃세오름으로 불렀다.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데서 연유한 이름으로, 아래쪽에 있는 세 오름에 대응되는 것이다.


병풍바위 안내판을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완만해진다. 윗세오름을 옆으로 우회해 걸으니 눈밭에 윗세오름대피소 지붕이 고갤 내밀고 있다. 윗세오름대피소는 1,677m로 우리나라의 대피소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정문으로 돌아가니 제설을 잘 해둬 이용에는 불편이 없다. 어리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밀어닥쳐 시끄럽다. 반가운 소란스러움이다. 컵라면으로 몸을 녹이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대피소 직원들이 돈내코로 가는 건 무리라며 만류한다. 서귀포 산꾼인 강상철씨와 이태봉씨가 거든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다. 남벽 분기점까지만이라도 가보자고 설득해 눈 속으로 향한다.


▲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내려서는 숲길. 대중적인 코스라 길이 비교적 잘 다져져 있다.

 

몇 발짝 가지 않아 통제소의 직원이 막는다. 열흘 이상 다니지 않아 눈이 깊다며 열 명이 와도 오늘 중으로 길을 뚫기가 어렵다며 엄포를 놓는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겠다고 직원을 달래 통과한다. 공단 직원은 30분 이내에 돌아오게 될 거라며 눈의 위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강씨와 이씨가 설피를 신고 앞에서 길을 낸다. 눈 덮인 구상나무들이 큰 덩치의 설인처럼 버티고 섰다.


눈보라가 칼날처럼 노출된 피부를 찾아 날카롭게 파고든다. 앞 사람과 몇 미터만 멀어져도 페이드아웃 된다. 사람에게서 잊혀지지 않으려 힘을 짜내 걷는다. 시야는 5m를 넘지 않아 사진 찍기 어렵다. 갈수록 눈이 깊다. 발이 빠져 체력 소모가 크다. 눈썹에 고드름이 맺혀 불편하다. 걸음이 쉽지 않다. 맞바람이라 눈 뜨고 있기 어렵다. 고글을 끼면 김이 서려 희미하기는 마찬가지다. 온통 하얗다. 풍경만으로는 이곳이 북극인지 남극인지 분간할 수 없어 설렌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 이런 설산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결국 되돌아 어리목으로 향한다.


영실에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 마주치는 사람 한 명 없이 적막했는데, 어리목 코스는 줄을 서서 올라온다. 사람들이 곧 이정표다. 완만한 눈의 평원이지만 눈보라가 심해 시야는 몇 미터를 넘기 어려워 이곳도 백지풍경이다. 등산로를 따르는 짐 운반용 모노레일이 간혹 눈에 띈다. 사제비동산에 닿자 길이 숲으로 든다. 조폭 같은 칼바람이 잦아들자 숲이 아늑하다. 고도를 내릴수록 바람이 잦아들고 시야도 열린다. 같은 한라산이라도 높이에 따라 변화가 심하다.


어리목의 숲은 섬세한 크리스털 숲으로 탈바꿈했다. 겨울산을 처음 찾은 이들에겐 동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크리스털 숲을 빠져 나오자 스노체인을 감은 차들이 서 있는 어리목 주차장이다. 


▲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길. 눈이 깊어 러셀이 쉽지 않다.

 

 

 

윗세오름이 들려주는 순백의 광시곡 속에서

산행 길잡이


굵고 짧은 눈과의 한판 승부


적설기가 아닌 때에 영실~윗세오름~어리목 코스는 넉넉하게 4시간이면 된다. 그러나 적설기에는 변수가 많으므로 나름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1100도로에서 영실휴게소까지 차량 통행이 가능한지 여부다. 영실탐방안내소(064-747-9950)에서 확인가능하다. 


1100도로 영실 입구에서 영실휴게소까지 5km 중간쯤에 영실탐방안내소가 있는데 제주시에서 오는 버스는 여기까지 운행한다. 40분 정도 걸으면 들머리인 영실휴게소가나온다. 적설기에는 영실 입구에서 승용차 통행이 불가한 경우, 스노체인을 감은 차만 통과시키는 경우, 스노체인을 감은 4륜구동 지프차만 통과시키는 경우가 있다. 길의 위험도에 따라 다르다. 


▲ 영실휴게소

11월부터 2월까지 동절기에는 영실탐방안내소에서 12시 이후로는 입장을 통제하며 윗세오름통제소에서는 오후 1시 이후에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코스를 통제한다. 영실휴게소에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는 4km에 1시간 30분이 걸린다. 그러나 겨울에는 적설량에 따라 2~3시간 정도 걸린다. 계곡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가파른 오르막이 나오는데 이곳 길의 상태에 따라 소요시간이 결정된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사람들이 많이 이용해 금세 길이 다져지는 대중적인 코스다. 하산길로 내려가는 데 4.7km에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겨울에는 샘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물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윗세오름대피소는 대피만 가능하고, 숙박은 불가능하다. 컵라면(1,500원), 커피(500원), 생수(700원), 초코바(1,000원), 건전지(1,500원), 아이젠(5,000원) 등을 판다. GPS로 확인한 산행의 실주행거리는 8.8km, 5시간 정도 걸린다.  
  
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실을 지나는 1100도로 버스가 있다. 11월부터 3월 말까지는 1일 7회(08:00, 09:00, 10:00, 11:00, 12:20, 13:40, 15:00) 운행하며 50분 걸린다. 요금 2,000원. 어리목으로 하산 후에는 중문에서 제주시로 되돌아가는 1100도로 버스를 타면 된다. 09:55, 10:55, 11:55, 12:55, 14:15, 15:35, 16:55에 버스가 있으며 제주버스터미널까지 20분 걸린다. 요금 1,500원.

 

 

 

 

 

 

 

제주 동거문오름ㆍ높은오름ㅣ 새별오름

 

일출이 좋은 오름 하면 보통 성산일출봉을 떠올린다. 일출봉 일출은 망망대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이라 어찌 보면 밋밋하다. 이에 반해 동거문오름은 일출봉에서 내륙으로 13km 정도 떨어져 있다. 낮은 오름들 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색다른 맛을 볼 수 있는 곳이 동거문오름이다. 동거문이 겨울 해맞이 장소로 좋은 것은 내륙의 설경 속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을 수 있어서다. 한 시간도 안 돼 끝나는 여느 오름과 달리 높은오름과 문석이오름을 연계해 길게 심설산행을 즐길 수도 있고 눈쌓인 완만한 비탈이 많아 적절한 준비물을 가져간다면 썰매를 타는 보너스도 있다.

동거문오름은 동검은이, 동거미로도 불린다. 동거문악(東巨文岳)이라고도 하며 사방으로 뻗은 모습이 거미집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다는 설과 검은거미를 닮았다고 해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거문오름과 구별하기 위해 동거문오름이라 한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있으며 높이는 340m다. 동거문오름 곁에는 문석이오름과 높은오름이 이웃하고 있어 연계해서 산행하는 게 오름을 즐기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들머리는 구좌공원공설묘지다. 묘지 바로 곁 오른편에 솟은 게 높은오름이다. 임도를 따라서 왼쪽으로 틀면 정면의 둔덕 아래에 ‘동검은이오름’ 표지석이 있다. 여기서 오른쪽 임도를 따라 가면 동거문과 문석이오름 사이의 안부에 닿는다.

안부에서 왼쪽 철조망 너머가 동거문오름이다. 철조망이 있으나 계단 같은 사다리가 있어 쉽게 지날 수 있다. 철조망을 지나면 다른 세상이다. 둥글둥글한 언덕의 연속이다. 고무를 잘라 길을 만들어 놓아 가파른 비탈이지만 미끄러지지 않고 오를 수 있다. 가파른 데를 5분 정도 올라가면 시야가 툭 터지며 정면에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발 앞에는 가파른 계곡이 있는 듯 보이지만 오름 특유의 분화구다. 나무가 드물어 굳이 길이 없어도 오르는 데는 불편이 없다. 처음보다 더 길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자 바다까지 보인다.

▲ 1 억새가 휘날리는 새별오름. 2 동거문오름 입구의 표지석. 동검은이, 동거미로도 불린다. 3 동거문오름 아래 분화구가 보인다. 4 구좌읍에서 가장 높은 높은 오름.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오름 밖에서는 그저 언덕 수준의 작은 산이었는데, 안에 들어오니 분화구도 여럿 있고 지형이 꽤 흥미롭다. 칼날능선처럼 양편으로 가파른 능선을 걷는다. 분화구의 담 위를 걷는 셈이다. 푹신한 흙길이라 높이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다만 바람의 섬답게 칼바람이 힘자랑하느라 바쁘다. 오른편 아래엔 좀 전의 것보다 더 크고 둥근 분화구가 있다. 자연이 만든 대형 콘서트장 같다. 사면에 등산객이 둘러앉고 아래에서 공연을 하면 실로 멋질 것이다.

오름은 흰색과 황토색이 섞여 있다. 눈과 철 지난 풀이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시선이 편안해지는 건 오름이 가진 동그란 미학 때문이다. 모난 데 없이 모든 선이 둥글둥글하다. 칼날능선을 내려와 무덤이 있는 너른 안부에서 앞의 둔덕을 오른다. 흙으로 쌓은 성을 오르는 듯하다. 오르막 위가 바로 일출 전망터다. 성벽 위처럼 길게 두루뭉술한 능선이 이어져 있고 바닥에 고무판을 깔아 전망을 보기 좋게 해뒀다. 

동쪽으로 거침없이 짱짱한 조망이다. 바로 앞에는 알오름들이 있고 뒤에 바람개비마냥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들, 그 뒤에 성산일출봉이 있다. 날씨가 좋았다면 바다 빛깔도 선명했을 텐데 잔뜩 흐리고 눈보라가 간간이 치는 어수선한 기상이다. 알오름은 무덤마냥 동그랗게 튀어나와 이름처럼 알같이 생겼다. 기관총 같은 바람이지만 밑으로 몇 발짝만 내려가면 잠잠하다. 제주 토박이이자 오름 산행을 수년째 하고 있는 오순희씨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보는 일출은 실로 멋있다고 한다. 바다에서 솟구치는 것은 물론 일출봉과 오름들 뒤로 떠오르는 태양은 더 아기자기하다는 설명이다. 굳이 일출이 없는 흐린 날씨 속에서도 볼 게 많다. 주변에는 다랑쉬오름처럼 덩치 큰 것부터 작은 용눈이오름까지 부드러운 덩치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능선을 타고 이어간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쳐다보니 노루가 뛰어다닌다. 청정한 자연 그대로가 남아 있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오름능선은 분화구를 가운데 두고 U자 모양,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 능선을 따라가면 다음 목적지인 문석이오름에서 멀어지므로 방향을 틀어 분화구 쪽으로 내려간다. 출발지였던 철조망이 있는 안부로 돌아가기 위해 길 흔적에 개의치 않고 한 바퀴 돈다. 분화구 안은 펑퍼짐한 게 소리가 잘 울릴 것 같다. 노루나 야생동물이 놀랄까봐 그러진 못한다.

사면을 돌아 작은 알 봉우리를 올라선 다음 내려서니 출발지였던 철조망 있는 안부다. 임도를 가로질러 오르니 바로 문석이오름이다. 억새밭에 눈이 가득하다. 동거문에 비하면 오르막이랄 것도 없이 펑퍼짐하다. 억새밭을 지나 꼭대기가 뻔히 보이는 부드러운 길을 오른다. 위에는 잔디밭이라 널찍하다. 안부에서 10분 걷자 동거문오름에서 정상이라 할 만한 지점이다. 워낙 완만해 딱히 정상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썰매를 타는 게 낫겠다 싶은 눈밭을 지나 북쪽 정면에 선 높은오름으로 간다. 405.3m로 구좌읍에서는 가장 높은오름이다. 눈으로 봐도 주변에서 가장 산다운 덩치다.

잔디밭이 끝나는 지점, 문석이오름을 내려가 높은오름 입구로 가야 하는데 마땅히 길이 보이질 않는다. 아래는 삼나무숲, 쓰러진 나무 사이를 치고 내려와 차를 세워둔 묘지 건물 앞에 닿았다. 건물에서 높은오름으로 이어진 임도가 있다. 길은 직벽을 오르듯 에두르지 않고 오르막을 정직하게 직선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뚜렷하고 숲이 있어 그나마 바람을 막아준다.

한참을 쉼터 없이 몰아붙이더니 중턱에 완만한 무덤지대가 있다. 잠깐 숨을 돌리고 10분을 더 오르니 꼭대기다. 밖에서 본 것과 다른 모습, 분화구가 있다. 완전한 원형 분화구라 모양새도 단순하고 깔끔하다. 꼭대기 지점에는 삼각점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지나온 동거문과 문석이가 무척 낮아 보인다.

높은오름도 일출맞이 오름 탐승지로 제격이다. 무엇보다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한라산을 뒤로 넘어가는 일몰 또한 아름다운 풍경화 같다고 오순희씨는 말한다. 다만 바람이 얼음송곳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분화구를 따라 한 바퀴 돈다. 도는 사이 동서남북의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든다. 한라산이 구름에 묻힌 것이 아쉽지만 제주의 숲과 오름들은 충분히 아기자기하다. 한 바퀴 돌아 올라온 길로 다시 내려간다.


오름 가이드 Guide


동거문오름은 승용차로 접근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에 구좌읍공설묘지를 검색해서 간 다음, 묘지 건물이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오름을 도는 것이 하산할 때 편하다. 문석이오름에서 높은오름으로 가는 정비된 길이 없으므로 덜 가파른 곳으로 가거나, 철조망 안부에서 왔던 임도를 따라 차를 세워둔 건물 앞까지 간 다음 높은오름을 올라야 한다. 동거문~문석이~높은오름의 산행 거리는 6.6km, 3시간 정도 걸린다. 동거문오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안부로 찾아 나오는 길이 희미한 편이므로 방향을 숙지하고 있든지 현지의 아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좋다.

 
 
 
 
 
 

결코 잊지 못할 달빛을 품은 거인의 무덤

 


새별오름·이달오름

 


일출이 좋은 오름을 올랐으니, 일몰이 좋은 오름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일몰이 좋은 오름 하면 서쪽 바닷가에 접해 있는 오름을 예상한다. 그러나 겨울 일몰은 바다 속으로 바로 잠기는 해보다 바다와 눈 쌓인 오름을 고루 비추는 햇살의 여운이 더 긴 법이다. 그래서 겨울 해넘이는 약간 내륙의 새별오름이 제주 겨울의 매력을 더 풍부하게 보여준다. 제주 산악인 고길홍(70ㆍ전 제주산악안전대장)씨와 함께 새별오름으로 향한다. 원래는 새벨오름이었다고 한다. 민초들이 집 지붕을 덮는 데 쓸 짚을 베는 오름이었다 해서 유래하며 세월이 흘러 바뀌어 새별이 되었다.

새별오름은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 있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서쪽이며 서부관광도로 바로 옆에 있어 접근이 편하다. 진입로도 포장되어 있고 주차할 공간도 드넓다. 여기서 매년 정월대보름 들불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수십 만 평 초원과 오름, 동녘자락이 붉은 화염에 휩싸인다. 소와 말을 방목하던 시절, 우마에 해가 되는 진드기 같은 해충을 없애기 위해 행했던 화입을 축제로 승화시킨 행사다. 시뻘건 화염이 일렁이는 밤하늘로 불꽃잔치가 섬광처럼 빛나면서 축제는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이 황홀한 장관을 보려고 제주사람은 물론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거대한 왕릉이다. 나무 하나 없이 거대한 잔디 덩이가 둥글둥글한 선을 그리며 산을 이뤘다. 멀리 있어도 능선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보일 정도다. 오름으로 가는 길은 드넓은 평지에 난 도로다. 비행기 활주로를 걷는 기분으로 거인의 무덤 같은 새별오름에 다가간다. 밑에서 올려만 봐도 능선의 경치가 시원할 거란 걸 알 수 있다. 어떤 모양의 화구를 품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마침 단체로 온 사람들이 오름을 내려온다. 평범한 이들이 아닌 장애아들을 봉사자들이 대동해서 왔다. 눈이 내려 20cm 넘게 쌓였는데도 이들이 즐겁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오름이다.

정면으로 바로 오르는 길이 있지만 사진가이자 오름 전문가인 고길홍씨는 오른편으로 이끈다. 오름 아래의 철책을 따라 240m 우측으로 가서 철망을 지나 말 목장 곁으로 오름을 오른다. 정면은 가파르니 오른편 능선으로 우회해서 오르는 것이다. 말들은 추위에도 끄떡 없이 풀을 뜯고 있다. 여느 오름들처럼 억새가 온 땅을 뒤덮었다. 눈이 쌓였지만 인기 오름이라 사람이 많이 다녀 길이 뚜렷하다. 간혹 얼어붙은 비탈이 있어 아이젠을 벗진 못한다.

사진을 찍어가며 느리게 걸었는데도 20분 만에 정상이다. 표지석과 삼각점이 있고 드넓은 경치와 혹독한 바람이 오름 나그네를 반긴다. 서쪽으로 새별오름보다 높은 오름이 없어 바다까지 시선이 닿는다. 넓은 평원과 사이로 솟은 많은 오름들,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이라 일몰은 없지만 날씨만 좋다면 잊지 못할 노을을 볼 수 있겠다. 아니 밤에 올라 달을 맞는 은밀한 장소로 써도 좋겠다. 그럴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흰색과 노랑이 어우러진 억새눈밭을 따라 간다. 갈림길에서는 북쪽 봉우리로 가는 길이 있다. 시야가 훤해 어디로 내려서게 될지 다 보인다. 이달오름(489m)으로 이어진 완만한 내리막 주위엔 무덤이 많다. 한결같이 돌로 낮은 담을 네모 낳게 쌓았다. 옛날에는 모두 소와 말의 방목지여서 가축이 무덤에 들어오는 걸 막고, 들에 난 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돌을 쌓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쪽 바로 옆에 이달오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달봉이라고도 하는데 고씨의 말에 따르면 이름만 봉일 뿐이지 엄밀히 따지면 모두 오름이라고 한다.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았는데 왼쪽의 봉우리가 더 높다. ‘이달(二達)’에서 ‘달’은 높다 또는 산 이라는 고구려에서 나온 말이다. 즉 두 개의 산봉우리를 뜻한다. 왼쪽 남봉에는 키 큰 삼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북봉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새별오름의 날머리로 내려서자 바로 이달오름 들머리다.

입구는 철책을 치고 사람이 ‘ㄷ’ 모양으로 돌아들어가도록 통로를 만들었다. 가축이 들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삼나무숲과 억새 오르막을 10분간 숨차게 오르자 바로 정상이다. 성격 급한 사람들이 좋아라 할 만한 코스다. 오르막에서 뒤돌아본 새별오름은 주차장에서 본 것과는 딴판의 다른 오름 같다. 굴곡이 훨씬 완만하고 너른 품을 가졌다. 겉은 무뚝뚝하지만 속 정 깊은 사람처럼 말이다.

고길홍씨는 오름의 매력에 대해 “차로 입구까지 갈 수 있어 접근이 쉽고, 올라가는 길이 짧고, 올라가면 경치가 시원하고, 아이들이나 노약자가 갈 수 있을 정도로 쉽다”고 한다. 오름의 다른 매력은 밖에서 본 오름은 작은 산이지만 올라가서 보면 화구가 있어 완전히 딴판의 모양새라 보는 재미가 있다. 또 비슷한 것 같지만 오름마다 각각 개성이 틀려 오름이야말로 제주도만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연환경이다. 오름은 육지의 자연과는 다른 점이 분명해 마치 다른 나라,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은 신선함을 육지 사람들에게 선사한다.   


정상에는 표지석과 삼각점, 산불초소가 있다. 나무가 높지만 북쪽으로 트여 있어 이달봉의 작은 봉우리와 제주 들판이 드러난다. 소나무숲을 따라 능선을 내려가다 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두 봉우리 사이의 안부로 이끈 다음 이달봉 북봉을 올려치게 한다. 안부에서 150m 오르면 북봉 꼭대기인데 ‘이달이 촛대봉’이란 표지석이 있다. 촛대봉 정상은 바위지대인데 정상에 닿기 직전에 세로로 길쭉하게 벌어진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바람을 막아주는 임시 대피소로 써도 될 성싶다. 제주말로 이런 굴을 ‘궤’ 라고 한다. 촛대봉 정상은 남봉보다 낫다. 표지석에 적힌 456m 높이가 GPS의 산높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바다가 새별오름에서 좀더 가깝다. 생전에 전망 좋은 곳을 선호하는 분이었는지 정상에 무덤이 있다. 

비탈진 내리막 길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로 바닥을 깔았지만 얼어붙은 눈길의 미끄러움을 완전히 막진 못한다. 사람 소리를 들은 노루 한 쌍이 저만치서 뛰어간다. 철책을 빠져 나오자 인가도 없고 차량 통행도 뜸한 도로가 나온다. 


▲ 1 이달오름의 촛대봉에서 본 서쪽 풍경. 2 거대한 왕릉을 연상케 하는 새별오름. 3 삼나무숲을 지나 이달오름 오르는 길. 뒤로 새별오름이 펑퍼짐하게 자리 잡고 있다. 4 새별오름 정상. 대부분의 오름은 오르기 쉽고, 경치가 좋고, 접근성이 좋다.

 

 

미니 인터뷰


제주사람 오순희
제주 바람처럼 시원한 여장부


제주 토박이 오순희(41)씨는 전국의 산 좀 탄다 하는 사람들에게 꽤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구조대 활동을 하며 활발한 산악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성격, 강한 체력도 한번 함께 산행하면 그녀를 기억하게 되는 이유다. 활동적인 성향의 오씨는 고상돈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대산련 청소년분과위원, 제주도연맹 등산의학이사를 맡고 있으며 제주시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한복집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통장과 산악회 회장을 겸하고 있었기에 과거에 비하면 덜 바쁜 편이란다.

고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던 그녀는 제주산악안전대 활동을 하며 2000년 여성 기혼자를 중심으로 한라솜다리산악회를 창립한다. 이후 자녀를 동반해 제주도의 알려지지 않은 오름을 숱하게 올랐다. 청소년 아웃도어 활동에 관심이 많은 오씨는 한국 보이스카우트 대장도 맡고 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하는 오름산행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며 “오름은 아직 체력이 약하고 인내력이 부족한 아이들의 체력향상과 정서순화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울산연맹에서 주관한 히무룽(7,126m) 원정에 참가해 5,800m까지 진출, “스무 살 때 가졌던 꿈을 나이 마흔이 되서야 이루게 됐다”며 활짝 웃는 제주 산악인 오순희씨다.



오름 가이드 Guide


새별오름과 이달오름은 자가용을 이용해야 한다. 1135번 서부관광도로 곁에 있어 접근이 수월하다. 차를 세우고 20분이면 새별오름 꼭대기에 설 수 있다. 정상에서는 능선따라 직진해서 이달오름으로 가거나 오른편의 북봉을 들러 능선을 타고 내려와 이달오름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이달오름은 이달봉과 촛대봉, 두 개의 봉우리인데 촛대봉을 지나 길 따라 서쪽으로 내려서면 도로를 만나긴 하지만 차를 세워둔 곳까지 돌아가기가 까다롭다. 촛대봉까지 가서 경치를 보고 온 길을 되돌아가 이달오름과 새별오름의 안부에서 주차장까지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이달오름과 촛대봉 사이 안부에서 새별오름 쪽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새별오름과 이달오름의 산행 거리는 3.3km,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숙식 (지역번호  064)

오름은 뿔뿔이 흩어져 있으므로 숙소는 제주시나 서귀포시에 잡는 것이 낫다. 제주시에서 유명한 맛집은 유리네(740-0890)다. 간단한 식사류부터 회나 구이류까지 다양한 제주 별미를 맛볼 수 있다. 도새기몸국(7,000원)과 성게미역국(8,000원)이 맛나다.

서귀포는 우정횟집(733-8522)이 유명하다. 서귀포시의 저렴하고 비교적 깨끗한 숙소로는 서문로터리 부근의 은하장(733-6678)이 비성수기 2만~3만 원에 이용 가능하고 여관 옆 골목의 수더분한 동네식당인 수궁식당(762-7948)도 괜찮다. 삼겹살과 전골, 사골곰탕(6,000원), 육개장(6,000원), 해장국(6,000원) 등이 있다.